나를 정리하고, 삶을 기록하고, 자유로 이끄는 글쓰기의 힘
“이야기가 된다는 건 멀어지는 것이구나. 존자는 앉은 채로 어렴풋이 깨달았다. 실바람 같은 자유가 존자의 가슴에 깃들었다. 멀어져야만 얻게 되는 자유였다. “
이슬아, 『가녀장의 시대』
어느 날, 글을 쓰면서 문득 깨달았다. 나의 이야기였던 것이 글이 되는 순간,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는 사실을.
한 편의 글로 옮겨진 순간, 나는 그 이야기를 쓰는 '나'이면서 동시에 그 이야기를 바라보는 독자가 되었다.
글을 쓰면 마음 깊이 웅크리고 있던 감정들이 슬며시 밖으로 나온다. 말로 하자니 울컥하고, 침묵하자니 무거운 그 감정들이, 조용히 단어로 옮겨질 때면 물속에 소금이 녹듯이 서서히 사라진다. 그리고 나면 마음 한편에 조용한 평온과 낯선 자유가 자리 잡는다.
나는 지금 블로그에 꾸준히 글을 올린 지 8 개월이 넘어가고 있다. 그 시간 동안 느낀 글쓰기의 장점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단순히 글을 쓰는 기술이나 습관 이상의 무언가였다.
1. 글쓰기는 나로부터 거리를 만든다
내가 주인공이었던 어떤 장면, 나만의 기억이 글 속에 담기고 나면, 나는 더 이상 그 이야기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글을 쓰는 나와 그 글을 읽는 내가 나뉜다. 그 거리감은 참 묘한 감정이다.
때로는 못난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도 되고, 반대로 그 상황을 잘 견뎌낸 나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글은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그리고 그 바라봄은 자연스럽게 성찰로 이어진다.
2. 감정과 사건이 정리된다
사건이 정리되지 않을 때, 나는 글을 쓴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간의 흐름대로 되짚어보거나, 공간의 이동에 따라 장면을 구성하기도 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 복잡했던 생각이 서서히 정리된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막연히 ‘화가 났다’ 고만 느꼈던 마음도 글을 쓰면서는 그 안에 어떤 실망이 있었고, 어떤 기대가 무너졌는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 감정을 언어로 설명하는 과정은 곧 마음을 치유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3. 표현이 살아난다
글을 쓰다 보면 표현력에 대한 욕심도 생긴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문장, 기발한 비유, 신선한 어휘를 만나면 메모해 둔다. ‘이 작가는 어떻게 이런 이미지를 떠올렸을까?’ 감탄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따라 하고 싶어진다.
그렇게 글은 나를 읽게 하고, 읽은 것은 다시 나의 글로 연결된다. 독서와 글쓰기는 서로를 자극하는 가장 좋은 짝이다.
4. 기록은 기억을 남긴다
글로 남긴 순간은 오래도록 기억된다. 어느 날, 다 큰 아들에게 태아 때 내가 쓴 편지를 읽어준 적이 있었다.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 그리고 아들이 함께 그 순간을 새롭게 경험했다.
글은 기억을 선명하게 만든다. 시간이 지나도, 다시 꺼내 읽을 수 있는 나의 삶의 증거다.
5. 글은 정신의 미래를 살아가는 도구다
리베카 솔닛은 『멀고도 가까운』에서 "만드는 이가 된다는 것은, 다른 이를 위한 세상을 만드는 일. 그저 물질적 세상뿐 아니라 그 물질적 세상을 지배하는 이념의 세계, 우리가 희망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꿈까지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글쓰기는 단지 과거를 정리하거나 현재를 붙잡는 행위가 아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가치와 희망, 그리고 삶의 방향까지 새기는 작업이다.
그날의 마음을 적는 일이 반복되면, 결국 그것은 나라는 사람의 세계관이 된다.
누군가를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살 만한 세상’을 상상하고 적어보는 일.
그건 아주 작은 실천이지만, 생각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다.
6. 함께 쓰고, 함께 살아간다
혼자 쓰는 글에도 ‘함께’라는 감정이 들어 있다.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누군가가 공감해 주는 댓글을 남길 때 느끼는 그 연결감.
내 글이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거나 웃음을 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살아가는 힘이 생긴다.
글을 매개로 우리는 서로의 삶을 조금씩 들여다보고, 멀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안부를 나눈다.
그건 묘한 위로이고, 감사이며, 따뜻한 교류다.
글을 쓰며 내가 가장 크게 배운 것은, 단 한 줄의 문장도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문장을 쓰는 나 자신도, 그 힘에 이 끌려 조금씩 변화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하루에 한 편씩 글을 쓴다. 크고 대단한 이야기를 담지 않더라도, 오늘을 살아낸 나의 흔적을 적는다. 어쩌면 이 글들은 언젠가 내가 잊고 살지도 모를 지금의 나를 가장 정확하게 기억해 줄 자서전이 될지도 모른다.
삶의 어느 시점에서, 그때의 나를 꺼내 읽을 수 있도록. 매일 나는 살아 있는 기록을 남긴다.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에게 보내는 가장 진심 어린 편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