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 사건
2년 전에 있었던 일이야. 난 이 일이 너무 바보스럽고 창피해서 누구에게도 말을 할 수 없었지.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 사건에서 멀어지고, 마음이 좀 무뎌졌는지 어쩌다가 주변 지인에게 얘기를 했어. 그런데 의외로 자기도 그런 적이 있다는 거야.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얘기했더니 그녀들은 친절하게도 자신의 실수 경험담을 나누어 주며 나를 간접적으로 위로해 주더라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비난하거나 무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라.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냐고?
세탁기가 고장 난 적이 있어. 갑자기 이 녀석이 배수를 못하더라고. 10년을 넘게 썼으니 갈 때가 된 거지. 엘지 서비스 센터에 전화를 걸어 서비스 신청을 했어. 그리고 며칠 후, 예약 날짜가 되어 아침에 기사님한테서 확인 전화가 왔어. 세탁기에 붙은 제품 모델 번호를 사진 찍어 보내 달라는 거야. 사진을 보내고 다시 기사님에게 전화가 왔는데 삼성제품이라는 거야. 뚜껑에도 삼성이라고 쓰여 있지 않냐고.
정말 확인해 보니 뚜껑 손잡이 앞에 영어로 커다랗게 SAMSUNG이라고 써 있는 게 아니겠어? 하, 이 황당함이라니, 순간 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주변에 대한 나의 부주의함과 무심함에 큰 실망을 했어.
왜 그랬을까? 그 큰 글자를 십 년 동안 빨래 할 때마다 봤을 텐데 이렇게 몰랐을 수 있을까?
부끄럽지만 변명을 해보자면, 그때는 엘지 통돌이 세탁기가 유명했던 때야. 난 통돌이 하면 엘지가 항상 한 묶음으로 떠올랐지. 그런데 나의 시어머니는 예전부터 삼성 가전제품이 튼튼하다고 삼성제품을 선호하셨어. 오래전에 어머니가 삼성 세탁기를 사주셨지. 그리고 뚜껑에는 먼지와 기스를 방지하게 위해 커다란 덮개를 반쯤 얹어 놓고 사용을 했어. 그래도 글자는 늘 드러나 있었을 거야.
그 사건 이후로 생각했어. 사람은 참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보는구나. 그래서 색안경이란 유명한 말도 있지. 우리는 객관적인 잣대가 아니라 주관적인 잣대에 얼마나 휘둘려지고 있는지, 감각적인 세계가 얼마나 오류 투성이 인지, 우리가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감각만으로는 세계를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
그 후로 내가 본 것이 언제나 틀릴 수 있음을 생각하며 겸손하게 살고 있어.
과학은 우리에게 우주에서부터 미립자의 세계까지 시야를 넓혀주고 있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야.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지. 생각의 깊이와 넓은 마음을 가진 새로운 눈이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