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아침부터 셋째 언니의 부르심이 휴대전화로 전해졌다.
"뭐 하냐?"
"응, 글 쓰고 있어."
"이따, 아버지 집에 몇 시에 올래? 호박죽 만들어야지."
"점심때 만나면 안 돼?"
"일찍 시작해야지, 점심 지나 가려면."
글을 마무리하고 뜨거운 호박죽을 담아 올 요량으로 스테인리스 그릇 두 개를 챙겨서 버스를 타러 갔다. 이런 젠장, 핸드폰에 올라 온 글을 읽다가 두 정거장을 지나쳤다. '여기가 어디지?' 네이버 지도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가다 보니 아는 길로 이어진다. 낯선 곳에서 친구를 우연히 만난 것처럼 반갑고 편안하다.
"호박죽 만든다고 호박죽 색깔 옷 입고 왔냐?
언니의 말을 듣고 보니 나의 티셔츠 색깔이 주황에 가까운 샛노란 색이다.
"어쩐지 오늘은 이 옷이 끌리더라고. 나 좀 센스 있지? 히히"
언니가 비닐을 깔고 시커먼 부엌칼과 오래된 감자칼을 이용하여 호박 껍질을 힘들게 벗겨내고 있다. 살구빛에 하얀 분이 새어 나온 호박 조각들이 나뒹군다. 조각의 크기를 보니 얼마나 큰 할머니 호박이었을지 짐작이 된다.
"호박 속에서 싹이 나버렸다. 이거 봐라. 얘네들이 우리가 먹을 영양분을 다 가져갔지 뭐냐." 언니가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밖에 두면 얼을까 봐 안으로 들여놨더니 그렇게 싹이 나버렸구먼. 진작 해 먹었어야 했는디" 아버지가 자신의 게으름을 탓하며 멋쩍어하신다.
한쪽 구탱이에 놓인 씨와 싹이 뭉쳐있는 더미를 헤쳐본다. 숙주처럼 길게 자란 호박 싹이 실타래처럼 너저분하게 엉켜있다. 호박 안에서 싹이 자라다니 꼭 엄마 뱃속에서 태아가 자라나는 것 같다. 알맞은 온도와 수분을 갖춘 호박 속 환경이 인큐베이터 역할을 한 것이다. 씨앗 하나하나에 싹이 매달린 모습을 보니 마침내 썩은 살들을 뚫고 세상으로 나와 햇빛을 받아 또 다른 호박들이 주렁주렁 열리는 모습을 상상한다. 자연의 생명력이 무섭기까지 하다.
호박 껍질이 단단하고 양이 많아서 손질하는 데만도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감자칼 삐져나온 부분에 걸려 손이 긁힌다. 예상보다 시간이 걸릴듯하여 속도를 높인다.
전에 호박죽을 끓여 보셨던 아버지의 훈수를 들어가며 커다란 곰솥 두 개에 호박을 삶는다. 삶은 호박을 창가에 두고 식힌다. 불린 찹쌀을 믹서기에 넣고 간다. 팥을 삶는다. 언니와 손발을 맞춰 척척척. 호박죽을 향해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얼마나 커다란 호박인지 가마솥 하나는 꽉 채울 양이다. 아버지와 나는 각자의 솥을 하나씩 책임지고 마지막 작업으로 호박죽을 쉼 없이 젓는다. 아버지가 흰 설탕을 넣으려는 순간 난 아버지를 제지한다.
"우리 거는 설탕 넣지 말아요. 각자 먹을 때 알아서 넣어 먹게요." 난 설탕을 싫어하다 못해 혐오하는 수준이다. 그래서 제육볶음을 할 때도 설탕 대신 꿀이나 원당을 사용한다. (그러면서 설탕 덩어리인 빵과 쿠키는 잘 먹는다. 모순 덩어리.) 지나친 건강 염려와 잔소리에 남편과 아들은 다른 세상 사람으로 선을 긋기도 해 왔다.
"아무 맛도 안 나네, 소금 좀 넣어봐라." 언니의 명령에 소금을 손에 한 움큼 부어 흩뿌려 넣었다. 그래도 싱거워서 다시 또 한 움큼을 넣었더니 이번엔 짜다.
"씁쓸하면서 맛이 없다, 설탕을 넣으면 괜찮으려나?" 언니가 아버지의 죽 냄비에 흰 설탕을 넣고 다시 맛을 본다. "응, 설탕을 넣으니 맛이 좀 나네."
꼬막을 삶아 양념장을 만들어 올린다. 아버지가 해 놓은 찰밥과 호박죽으로 점심 식사를 간단히 한다. 식사를 먼저 마친 아버지가 사라지더니 잠시 후 아이스크림콘을 검은 비닐에 한 봉지 사 오셨다. 딸들이 와서 기분 좋아하는 아버지를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다.
한 김 식힌 호박죽을 담는다.
"이렇게 작은 그릇을 가져왔어. 여기 큰 양푼에다 많이씩 퍼서 담아 가." 아버지의 온정만큼이나 커다란 양푼 그릇을 내어 주신다.
"뚜껑이 없어서 안 돼요." 가져온 통들을 가득 채워 길을 나선다.
호박죽 담긴 0 마트 가방을 애지중지하듯 두 손으로 번쩍 들어 올리며 조심스럽게 버스에 올랐다. 나도 모르게 버스 기사에게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기사는 기분 좋게 인사를 받아주고 내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려 준다. 또 정거장을 지나치지 않게 신경을 썼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호박죽을 대접에 담아 꿀을 조금 넣고 전자레인지에 돌려 맛을 봤다. 웬걸, 진짜 꿀맛은 이런 것이지 싶다. 향긋하고 잘 익은 호박향이 코를 자극한다. 기분 좋게 수업을 하고 요가 가기 전에도 한 그릇 뚝딱. 아쉬움이 몰려든다. '더 가져올걸!'
행복은 전염된다. 만약 바이러스 중에도 좋은 바이러스가 있다면 행복 바이러스도 그중 하나다. 호박 안에서 피어난 그 바이러스가 호박죽을 먹는 동안 계속 퍼져 나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