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데미안을 깨우는 춤

데미안을 읽고

by 문이



나는 종종 내가 누구인지 잊은 채 살아간다. 사회가 요구하는 단정함과 안정 속에서 흔들리지 않으려 애쓰다 보면, 내 안의 에너지는 점점 사그라든다. 크게 웃지도 않고, 지나치게 화내지도 않고, 무엇이든 적당한 선에서 다듬어 내며 살아가는 동안, 나는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 한쪽이 답답해졌다. 마치 나라는 존재가 조심스러운 틀 안에서 조금씩 마르는 느낌이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그 답답함을 건드리는 소설이었다. 싱클레어는 착한 아이로 살아가며 스스로를 억누르지만, 데미안은 그에게 말한다. 너는 너의 길을 가야 한다고. 세상이 정해둔 기준에 맞추어 살다 보면 결국 자기 자신을 잃게 된다고.

'나는 정말 내 삶을 살고 있는가.'

내게 그 질문을 몸으로 확인시켜 주는 일이 있다. 셔플댄스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셔플댄스는 나에게 생각을 멈추고 살아 있는 몸으로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춤을 출 때 나는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게 된다. 어깨에 얹혀 있던 긴장이 조금씩 풀리고,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걱정들이 잠잠해진다. 몸이 리듬을 기억하고, 발이 박자를 찾는다. 그때 나는 늘 조심스럽게 살던 내가 아니라, 살아 있는 나로 돌아온다. 나는 셔플댄스를 통해 내가 억눌러 두었던 감정과 에너지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피스토리우스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우리가 보는 것들은 우리 안에 있는 것과 같다.' 세상은 내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내가 마주하는 많은 것들은 내 내면을 비추는 거울일 수 있다. 불편한 사람도, 긴장되는 상황도, 어쩌면 내 안의 흔들림이 밖으로 드러난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 생각은 내게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했다. 나는 세상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해하는 과정 속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무대에 서면 긴장이 올라온다. 발이 꼬일까 두렵고, 실수할까 겁이 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긴장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면, 그것은 방해가 아니라 에너지가 된다. 긴장과 떨림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떨림을 끌어안은 채로 움직일 수 있게 된다.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처럼, 모든 것은 서로 얽혀 있다. 긴장도 나의 일부이고, 그 떨림 또한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나는 셔플댄스를 통해 업(業)의 감각을 배운다. 내가 세상에 던지는 에너지가 결국 다시 내게 돌아와 삶의 방향을 만든다는 사실을, 발바닥으로 배운다.


나는 셔플댄스를 '대지의 춤'이라고 생각한다. 발을 들어 올리고 다시 내려놓는 단순한 동작이지만, 그 반복 속에서 나는 바닥과 끊임없이 소통한다. 바닥은 내가 어떤 리듬을 밟든 묵묵히 받아준다.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어설프면 어설픈 대로. 그리고 그 힘을 다시 내 몸으로 돌려준다. 나는 그 순간 에바 부인을 떠올린다. 선과 악, 빛과 어둠, 모든 대립을 품어주는 존재. 대지는 그 품처럼 나를 판단하지 않고, 밀어내지 않고, 그대로 지탱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고, 서툴러도 괜찮다. 넘어질 수 있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어느 순간, 나는 내 안에 '표식'이 새겨지는 느낌을 받는다. 싱클레어가 느꼈던 카인의 표식처럼, 그것은 남들과 다르다는 증표이자, 스스로의 길을 책임져야 한다는 감각이다. 무대 위에서 나만의 리듬을 타고 있을 때, 타인의 박자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 박자를 만들며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또렷해진다.


헤세는 말했다. "만일 외부 세계가 붕괴한다면 우리 중 한 명이 세계를 다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안에는 세상을 다시 세울 힘이 있다. 다만 우리는 너무 오래 그것을 억누르고 살았을 뿐이다.


오늘도 남들의 박자가 아닌, 내 안의 데미안이 이끄는 리듬을 따라 한 걸음씩 움직인다. 그리고 그 리듬 속에서, 나는 나를 다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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