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마치 꿈속 세상에 들어온 듯한 이상한 경험을 했다. 밀리의 서재에 실린 오디오북,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들으며 산책을 하려고 집을 나섰다. 이 성우의 목소리는 어딘가 이병헌을 닮았다. 낮게 가라앉은 중저음이 고행자 싯다르타와 잘 어울렸다. 문장은 명상처럼 스며들었고, 나는 그 리듬에 맞춰 걸음을 옮겼다.
고행의 맛을 조금 느껴보고 싶어 일부러 배고픔을 참고 길을 나섰다.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길게 걸어볼 생각이었다. 굴포천으로 향했다.
가보지 않은 길로 가고 싶었다. 신호등에서 멈춰 서는 것이 싫어 신호등이 별로 없는 길을 택했다. 대로를 따라 걷다 보면 하천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길은 이어지지 않았다. 주유소와 건물들의 벽이 앞을 막고 있었다. 잠시 멈춰 서 있다가 다시 돌아섰다. 골목이 하나 보여 망설이다가 그 안으로 들어섰다.
포장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길 위로 마른 흙이 일어나 발목을 스쳤다. 고물상이 보였고, 얇은 금속판으로 둘러쳐진 담장 안에서는 화학약품 냄새가 새어 나왔다. 머릿속이 순간 흐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침 할 일 없는 일요일 대낮이었다. 예상보다 따뜻한 봄날이라 골목 안에는 열기가 빠져나가지 못한 채 머물러 있었다. 잘못 들어선 그 길에서 냄새와 더위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괜히 들어왔나 싶은 생각이 스쳤다.
그래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길은 다 통하니까.
조금만 더 가면 나오겠지.
하지만 걸음을 옮길수록 풍경은 점점 낯설어졌다. 공장들이 이어지고, 관광버스 차고지가 나타났다. 문은 닫혀 있었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어스름하고, 묘하게 비어 있는 공간이었다.
여긴 아닌데.
그 생각이 드는 순간,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방향 감각이 흐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같은 방향으로 걸어오는 누군가의 발걸음이었다. 별일 아닐 수도 있는데, 머릿속에 여러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괜히 더 불안해졌다.
발걸음이 저절로 빨라졌다.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뒤를 돌아보니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저 같은 길을 걷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이미 몸은 긴장을 기억하고 있었다.
더 들어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가, 방향을 바꿨다.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가기 시작했다.
다시 그 냄새였다. 화학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시멘트 벽돌로 쌓은 담장 앞에는 가시 돋친 엄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나무들은 이상하게 위협적으로 보였다. 마치 이빨을 드러낸 짐승들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듯했다.
시선을 떼고 빠르게 걸어 나왔다.
한참을 걷고 나서야 시야가 트였다.
드디어 굴포천에 닿았다.
하천 위를 떠다니는 오리들, 막 피기 시작한 벚꽃,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가 한꺼번에 눈에 들어왔다. 그 풍경 앞에서 걸음이 느려졌다. 긴장이 풀리자, 문장이 먼저 떠올랐다. 나는 사진을 찍고, 짧게 글을 남겼다.
돌아오는 길은 달랐다. 같은 길인데도 전혀 다른 풍경처럼 보였다. 주택가 화단의 꽃과 나무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아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묘한 만족감이 남았다. 길을 잃고도 끝내 도착했다는, 작지만 분명한 성취감이었다. 배를 채우자 피로가 밀려왔다. 글을 이어가다 어느 순간 잠에 빠졌고, 생각보다 긴 낮잠을 자고 일어났다.
나는 꿈에서 자주 길을 잃는다. 늘 시간에 늦어 허둥대고, 목적지를 찾지 못해 헤매는 꿈. 깨고 나면 더 피곤해지는 꿈.
오늘은 그 꿈의 세계를 현실에서 걸어 나온 느낌이었다.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잠시 다른 길을 걸었을 뿐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