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후원을 다녀와서
창덕궁은 다른 궁궐들과 달리 자연 지형에 맞춰 지어져 그 독특함이 남다릅니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유를 걷다 보면 몸소 느끼게 되죠. 선조 때 경복궁이 불탄 이후 오랫동안 왕들의 사랑을 받았던 이 공간은, 지금 빛과 바람을 들여 정화하는 기간이라 문들을 활짝 열어두고 있었습니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한옥의 선과 그 너머의 풍경이 한복처럼 참 곱게 어울립니다.
깊은 바다 색깔을 닮은 청기와는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맑아집니다. 화약 제조에 들어가는 염초를 사용하여 제작 비용이 엄청나게 비싸다는데, 그만큼 귀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더군요.
단청에서 보라색을 본 건 처음이라 한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고즈넉한 궁궐에 더해진 현대적인 세련미 같달까요?
이번에는 특별히 후원 관람을 위해 미리 예약을 하고 해설사님의 깊이 있는 설명과 함께 하였습니다. 익숙한 궁궐의 모습 너머 유독 마음을 머물게 하는 작고 세밀한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담벼락 기와 사이에 뿌리를 내린 풀 한 포기를 보았습니다. "저 풀은 작품이 되고 싶었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척박한 기와 위에서도 당당히 자신만의 자리를 지키고 있더군요. 왜 이런 작은 것들에 자꾸 눈길이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홍매화
살구나무
봄날의 창덕궁은 유독 마음을 일렁이게 합니다. 담벼락 너머로 흐드러진 매화는 다음 주면 절정을 이룰 것 같습니다. 아직은 구슬처럼 매달린 홍매화 몽우리들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기분 좋은 긴장감을 줍니다.
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이제 막 꽃 차릴 준비를 마친 살구나무와 붉은 구슬처럼 매달린 홍매화가 손님맞이 준비에 한창입니다.
부용정
후원에 위치한 부용정(芙蓉亭)은 정자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연꽃입니다. '연꽃 부(芙)'와 '연꽃 용(蓉)'을 써서 이름 붙여진 이곳은, 지붕의 겹겹이 놓인 곡선이 마치 피어나는 연꽃잎을 닮아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산비탈에 하늘거리는 분홍빛 진달래를 보니 문득 어릴 적 생각이 납니다. 산에서 진달래꽃을 따 먹었는데 약간 시큼한 맛이 났던 거 같아요.
꽃다지
화단에는 꽃다지가 피어 있었습니다. 노란빛을 머금은 이 작은 꽃들이 봄을 가장 먼저 알리고 있네요.
자연을 닮은 부채꼴 모양 정자
생강나무
연못 주변에 심어진 생강나무의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힙니다. 노란 꽃망울이 터지며 내뿜는 향기에 취해 걷다 보니, 임금님들이 왜 이곳에 수많은 정자를 지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규장각이 있는 곳
규장각으로 향하는 어수문
규장각 앞 '어수문'에는 '수어지교'의 뜻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물과 물고기처럼 임금과 신하가 끈끈하게 맺어지기를 바랐던 마음.
알고 계셨나요? 우리나라 전통 장식에 많이 쓰이는 이 조각은 바로 박쥐를 나타낸 것이라고 해요.
박쥐를 뜻하는 한자 '복(蝠)'이 복을 뜻하는 '복(福)'과 발음이 같기 때문입니다. 즉, 건물 곳곳에 박쥐 문양을 넣은 것은 그 공간에 '복'이 가득하기를 바라는 선조들의 재치 있는 기원이었던 셈이죠.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파란 하늘이 마치 꽃무늬 이불을 덮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매화 가지가 수놓아진 하늘과 청기와, 그리고 보라색 단청의 조화는 오직 이 계절, 이 공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사치 아닐까요?
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창덕궁처럼, 우리의 삶도 때로는 흐르는 대로, 때로는 피어나는 꽃들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갔으면 좋겠습니다. 척박한 기와 위에서도 작품이 된 풀 한 포기처럼 말이죠.
지붕을 뚫고 위로 위로 뻗어 나가는 나무처럼, 창덕궁의 봄은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화분에 심어진 기묘한 돌들부터 이름 모를 노란 들꽃까지,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주, 매화가 활짝 피어날 때쯤 다시 한번 이 길을 걷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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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은 문화재 보호와 관람 질서를 위해 사전 예약제로 운영되며, 해설사님의 안내에 따라 그룹별로 이동하며 관람하게 됩니다.
자유롭게 다니는 것도 좋지만 전문가의 설명을 곁들이니 무심코 지나쳤던 돌 하나, 정자와 건물에 담긴 역사적 배경을 알 수 있어 훨씬 유익했습니다. 빛과 바람이 정화하는 창덕궁의 봄을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후원 예약은 필수입니다.
궁궐 예약 링크
https://royal.khs.go.kr/ROYAL/contents/menuInfo-cdg.do?grpCode=cd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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