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어머니가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고 혼자 남겨진 아버지는 우울해 보였다. 열여덟에 시집와서 육십여 년을 떨어진 적 없이 함께한 부부였으니 텅 빈 집에 혼자 남겨진 현실이 낯설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 심장이 안 좋아져서 병원에 자주 입원하고 구급차를 타고 중환자실에도 있긴 했지만 그때는 병실에 자주 가서 얼굴이라도 보았고 보호자로서 책임감도 있어서 공허함 같은 건 생각지도 못했다.
어머니가 얼마 못 살 거라고 병원으로부터 판정받은 날부터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살림하는 법을 전수했다. 전기밥솥에 밥 하는 법, 국 끓이고 반찬 하는 법, 세탁기 사용법 등을 배웠고 많이 아프면서는 아버지가 차차 살림을 도맡아 했다. 어머니가 등, 다리가 아파서 고통스러워할 때는 주물러 주기도 하고 예쁜 말도 하는 살가운 남편이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고 명주 아버지는 이제 혼자 생활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살림도 능숙하게 잘했다.
어느 날 나는 아버지와 밖에서 같이 점심 식사를 하고 따뜻한 봄볕을 쬐러 커피를 손에 들고 공원을 산책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어머니 얘기가 나왔는데 아버지가 예전에 시골마을에 살 때 있었던 일이라며 얘기했다.
"한 번은 당산 밑에 월천댁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디 그 집 식구들이 쌀이 없어서 굶는다더라. 그래서 내가 월천댁한테 쌀을 좀 주겠다고 약속을 했제. 그래도 우린 굶지는 않았은께. 다음날 쌀을 갖다주려고 느그 어머이한테 얘기했더니 우리 먹을 것도 없다고 못 가져가게 허는 거여. 근디 주기로 약속을 혔는디 어뜨케. 그래서 그때 또 크게 싸웠지 않냐 참." 하며 후회한다는 다음 말은 마음속에 묻은 듯 끝을 얼버무렸다.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가 마음속의 말을, 그것도 자신이 잘못했던 것을 고백하는 말을 들어 본 것은 처음이어서 나는 놀랐다. 아내에게 못해줬던 지난 일들에 대한 죄책감이 아직도 무겁게 아버지를 짓누르고 있구나 생각하니 아버지가 안돼 보였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작은 시골마을에서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허세를 부리며 살았다. 좋게 말하면 불의를 못 보고 이웃들에게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학교 육성회장과 마을 이장을 맡으며 집안일은 어머니에게 일임하고 공동체 일에 열정을 쏟으셨다. 지원된 재원에 집안 재산까지 보태어 마을 길을 닦고, 벽돌을 쌓고, 학교 운동장에 모래를 깔아주는 등 공동체의 유명 인사였다. 학교 선생님들과 이웃 주민들과 자주 어울리는 자리에 술은 빠지지 않았다. 한 번은 술 좋아하는 한 선생님이 우리 집에 아버지를 따라와서 "미자야, 너희 집에 좋은 매실주가 있다매, 매실주 좀 내와봐라!" 했다고 언니한테 들은 적이 있다. 아버지가 선생님들과 친한 덕에 딸들은 학교에서 친절하고 사랑 많은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의 사 학년 때의 선생님을 빼고는. 사 학년 담임 선생님과 아버지가 싸우는 바람에 나는 선생님의 미움을 받았고 수학 과목의 분수 단원으로 고통받은 작은 상처가 아직도 남아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아버지가 혼자된 지 팔 년째에 접어든다. 어린 시절 무섭기만 했던 아버지는 이제 아들딸의 보살핌이 필요하다. 눈, 귀, 치아, 다리, 모든 것에 장애가 오고 있다. 힘을 빼고 나서야 자식들과 농담도 하고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큰 언니 집에 들어와 사시자고 해도 아버지는 싫다고 한다. 어머니와 함께 살던 자리가 본인이 있어야 할 자리처럼 친숙하고 편하신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