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리뷰
"나는 또 물구나무가 서고 싶어졌다. 악을 쓰며 물구나무를 서서 온 매장을 헤매며 여러 사람의, 자기가 살아갈 길을 충실히 지키고 있는 여러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소리쳐 묻고 싶었다.
오늘 저녁 침팬지 앞에 가는 것이 옳으냐, 안 가는 것이 옳으냐 하고, 나는 그것조차도 모른다고. 그러나 나는 그 물구나무도 못 서고 악도 못 쓴 채 멍하니 갈까 말까 만을 되풀이했다."
202쪽
경아는 아버지와 오빠들이 세상을 떠나고 삶의 의지가 없는 어머니로 부터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 외로운 신세다. 그녀는 눈에 띄도록 물구나무라도 서고 악이라도 써서 자신을 좀 바라봐 주기를 바란다.
" 눈 때문에 어둠도 부옇고 어둠 때문에 눈도 부옇고. 고개를 젖히니 하늘도 자욱하니 별빛을 가로막고 암회색으로 막혀 있었다. 나는 명도만 다른 여러 종류의 회색빛에 갇혀서 허우적대듯 걸었다. 아무리 허우적대도 벗어날 길 없는 첩첩한 회색, 그 속에서도 나는 환상과도 같은, 회상과도 같은 황홀한 빛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완구점 앞에서의 옥희도 씨와의 만남이 그것이었다. 그것은 환상이라기에는 너무도 황홀해서 마치 환상 같으면서도 환상이라기에는 너무도 생동하는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곧 태수와 그의 가족들과 있었던 일은 잊었다. 그것은 그냥 뿌연 회색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216쪽
전체적으로 그녀의 암울한 세계는 회색으로 표현된다. 그녀가 갈망하는 세계는 노란 은행나무 같은 황홀한 빛의 세계이다. 박완서 작가는 이런 색의 대비로 현실과 이상의 세계를 대조적으로 이미지화 시킨다.
그녀는 어머니와 살고 있지만 어머니는 삶을 놓아버렸기 때문에 유령이나 마찬가지다.
그녀는 지옥 같은 전쟁 상황에서 벗어나서 잃어버린 자아를 찾고자 발버둥을 치지만 오히려 처절한 현실을 실감할 뿐이다.
"나는 그런 그림들에서 어떤 언어를 시작했다기보다는 그냥 빛과 빛깔을 즐겼다. 삶의 기쁨이 여러 형태의 풍성한 빛깔로 나타난 그림들을 사랑했다. 이렇게 나의 그림에 대한 눈은 오색 풍경을 동경하는 아이들처럼, 포목점 앞에서 아름다운 천을 선망하는 여인처럼 소박하고 단순했다.
내 이런 소박한 감상안은 그의 그림에 적잖이 당혹해하고 있었다."
267쪽
경아는 옥희도 씨가 그린 이 그림을 보며 고목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이의 어두운 마음을 나타낸 것 같아 마음 아파한다. 당돌하게도 '모딜리아니의 그림 속 여인같이 목이 긴', '이조백자를 닮은' 옥희도 씨의 아내를 꾸짖는다.
후반부는 경아가 마주한 지나간 일들을 구체적인 장면들로 보여준다.
인민군과 국군 사이에 쫓고 쫓기는 상황, 서울 집에 숨어 지내는 숨 막히는 상황에선 '안네의 일기'가 떠올랐다. 가족들이 죽고 피난을 가고,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 그 기억을 안고 살아야 하는 살아남은 자는 더욱 비참했다. 붉은 사루비아 꽃도 마주할 수 없는 그 속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살기 위해 애를 쓰고 희망을 구했을까?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우리에게 작가가 보여준 그 시대는 너무도 처절했다.
화가는 나목의 그림에 살고자 하는 소망을 담았으니 이제 나목은 그냥 벌거벗은 나무로 보이지 않는다. 줄기 안에서 새싹과 꽃망울들이 숨을 크게 한번 머금고 곧 세상 밖으로 뿜어져 나올 준비를 하는 세포들의 꿈틀거림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