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선생님의 글을 읽고 책을 덮을 땐 짙은 여운에 가슴 어딘가가 울컥해진다.
이 책을 읽으며 20대의 사랑의 감정, 자유에 대한 갈망, 전쟁 속에서의 개인의 고통, 삶에 대한 절망과 의지, 6,25 전쟁 당시의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 당시 여성들의 삶 등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주는 위로가 이런 것이구나. 소설 속 그녀는 아파하는데 나는 위로를 받는다니 뭔가 이기적이다.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내 과거 속 감정들이 깨어나고 명확해진다. 그러면서 삶이 풍부해지고 배가 불러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설책을 읽나 보다.
소설 속 주인공 이경은 죽음과 삶 사이에서 허우적 거린다. 증오와 질투에서 살고자 안간힘을 쓰는 그녀가 안쓰럽다.
" 그는 난리 통에 하나도 다치지 않은 그의 아들딸의 이름을 나열하며 완전히 주름을 폈다. 순간 그는 거침없이 행복해 보였다. 우리 집의 처지와 자기들을 비교함으로써 그의 행복은 완벽한 것 같았다. 남의 불행을 고명으로 해야 더욱더 고소하고, 만난 자기의 행복......."
63쪽
큰아버지 자식은 전쟁에 살아남았고 경아의 오빠들은 경아가 제안한 은신처에서 폭격을 맞아 숨졌다. 경아의 심술궂은 이 엿보인다.
" 스산한 바람만이 차양을 덜컹이고, 미닫이를 가늘게 흔들고, 또 어디서 나는지 모를 흉융한 소리를 내며 온 집안을 횡행했다.
나는 이불을 푹 썼다.
그래도 들리는 흉가를 흔드는 바람 소리, 행랑채의 뚫어진 지붕으로 휘몰아쳐 들어와 부서진 기왓장을 짓밟고, 조각난 서까래를 뒤적이고 보꾹의 진흙을 떨구고, 찢어져 늘어진 반자지와 거미줄을 흔들고, 쌓인 먼지를 날리느라 마구 음산한 휘파람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는 바람은 이불 속에서 귀를 막아도 사정없이 고막을 흔들어 댔다"
65쪽
전쟁의 참상을 이 폭격 맞은 기와집에 고스란히 나타내었다. 그 속에서 떨고 있는 경아가 안타깝고 애처롭다.
" 맛난 것만 가려서 먹고 푹신하게 자고 고상한 생각만 골라서 한 것 같은 이 큰 집의 귀하디귀한 장손에게 어머니는 김칫국을 먹였겠지? 아니면 된장에 김치를 썰어 넣은 찌개쯤에 먹였을까? 하여튼 상을 받은 진이 오빠의 얼굴을 못 봐둔 게 한이지만 그에게 사정없이 김칫국을 먹였다는 생각은 큰 소리로 웃고 싶으리만큼 통쾌했다"
177쪽
큰집 오빠가 집으로 들어와 살라고 제안을 하러 왔다. 둘의 대화가 날카롭다. 경아의 삐뚤어진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공감이 되고 나까지 통쾌했다.(김칫국을 먹이진 못했다.)
" 그러나 나는 미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나는 내 속에 감추어진 삶의 기쁨에의 끈질긴 집념을 알고 있다. 그것은 아직도 지치지 않고 깊이 도사려 있으면서 내가 죽지 못해 사는 시늉을 해야 하는 형벌 속에 있다는 것에 아랑곳 없이 가끔 나와는 별개의 개체처럼 생동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사랑을 시작하게 된 것일 것이다"
188쪽
그녀는 유부남인 옥희도 씨에게서 아버지와 오빠들에게 받았던 사랑을 갈구했다. 그것은 삶에 대한 의지이자 희망이었다. 그녀에게 화가로서의 옥희도 씨는 겨울을 견뎌내고 봄을 피워내는 나목이었다.
" 어쩜 나는 그런 소중한 걸 걸고 만 것일까? 침팬지 앞에서의 고마운 해후, 그리고 어두운 산책길에서의 그의 숨 막히는 열기, 그 열기에의 무분별한 이끌림과, 두렵디두려운 망설임. 이런 소중한 것들을 걸고 나는 셈을 세었다. 아까보다 느리게 샘을 세었다. 점점 더 느리게 여덟 아홉 열을 끝마쳤다. 셈을 끝낸 나는 마치 낯선 역에 내린 것처럼 조금 암담하고 조금 허허했다. 나의 내기를 엿본 사람이 없으니 나에게는 아직 그를 만날 수도 안 만날 수도 있는 자유가 있는 셈이었으나 나는 나의 내기를 지키기로 했다. 그에 대한 야속함을 그렇게 해서라도 풀고 싶게 나는 좀 토라져 있었다. 오늘 어느 순간, 풍성한 눈발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의 일별만으로도 가히 충일을 얻을 수 있는 아주 작은 그릇이었는데, 그는 그 일별을 끝끝내 거부하고 말았던 것이다"
196, 197쪽
사랑에의 고통이 느껴진다. 기다림과 설렘과 허탈함이 뒤섞인 감정. 침팬지 인형 앞에서 그와 매일 한 번씩 만났던 것으로도 만족스러웠는데, 말도 없이 사라진 그에게 토라져서 행동하는 모습이 귀여우면서, 사랑의 모습이 그려진다.
소설을 읽으며 내 젊은 날이 떠올랐다. 설익은 사랑의 감정 앞에 방황하던 모습. 경아의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이 된다. 잊어버린 그 시절의 감정들이 살아난다.
경아의 삶에 대한 태도가 왜 이렇게 삐딱하고 부정적인지, 앞부분에서는 암시만 하기에 그녀의 감정의 원인이 좀 불투명하다. 뒷부분을 읽고 나서야 그녀를 온전히 이해하게 되고 더욱 공감하고 응원하게 된다.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