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국의 높임말이나 호칭에는 우리의 전통문화에서 오는 인간관계의 질서와 예법이 담겨있다. 자신을 낮춤으로 어른을 공경하고 상대방에게 격식을 갖추어야 하는 것들이 언어에서도 좀 복잡하게 녹아있다.
박완서 작가님은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라는 글에서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호칭과 존댓말에 대해 언급한다. 글에는 요즘 세상에 맞춰가야 할 언어생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담아냈다. 자신을 '교수님'이라고 부르거나 '박완서 씨'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고맙습니다' 와 '고마워요'의 차이에 대해, 어떤 젊은이들은 이름을 물었을 때 '김'자 '철'자 '수'자라는 식의 대답을 하는 것에 대해 다루고 있어서 흥미 있게 읽었다.
그 글에는 손자가 할아버지한테 '이 신발 엄마께서 사 주신 거야.'의 잘못된 예도 다룬다. '이 신발 엄마가 사 준거예요'가 맞는 표현이다. 할아버지가 엄마보다 윗사람이므로 엄마를 낮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말에는 이런 복잡한 인간관계의 질서가 담겨있다. 초등학교 3학년 국어책에 높임말을 다루는 단원이 있다. 언어에서도 예전만큼 예법을 따지지 않는 가정이 늘다 보니 아이들이 이 단원을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호칭 또한 너무 헷갈린다. 식당에 가서 직원을 부를 때 '이모님', '사장님', '저기요', '여기요', '언니' 다 나온다. 한 번은 내가 나보다 어려 보이는 여자 직원에게 '언니! 여기 김치 좀 더 주세요!"라고 말했더니 남편과 아들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왜 그렇게 부르냐고 핀잔을 준 적이 있다. "그럼 뭐라고 해?" 했더니 사장님이라고 하란다. 난 그것도 좀 이상해서 여러 가지 표현을 돌려가며 쓰거나 부르는 일을 떠맡지 않는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남편을 오빠라고 불렀다. 연애 때 습관이 남아서 갑자기 고치기가 힘들었다. 친정에 갔을 때 오빠라고 했더니 아버지가 꾸짖으셨다. 그래서 아이를 낳고는 아이의 이름을 넣어 00 아빠라고 불렀고 남편은 나를 00 엄마라고 불렀다. 우리의 이름은 사라지고 아들을 매개로 한 관계로만 존재하는 듯한 호칭이었다.
요즘은 가끔 남편이 밖에서 다른 사람과 있을 때 나에게 당신이란 말을 쓴다. "당신은 어떤 게 맘에 들어?" 부모님들끼리 쓰던 말을 내가 들으니 살짝 늙어가는 느낌과 존중의 느낌이 섞인듯한 어색함이 있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박완서 작가님은 나의 이런 과거에 사용했던 호칭들이 잘 못되었다고 가르침을 주시는 듯 글에다가 이렇게 쓰셨다.
" 서로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신혼부부에게 여보 당신이란 좋은 말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고 했더니 악 소리를 지르며 닭살이 돋을 것 같다나. '여보' '당신'이 좀 드라이하긴 해도 닭살이 돋게 징그러울 건 또 뭔지 잘 이해가 안 된다. 나야말로 닭살이 돋는 것은 요즘 새댁들이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걸 들을 때이다. 스타에게 열광하던 오빠부대일 적의 환상을 내 남자에게 전이시키고 싶은 소녀취미는 연예 기간에 대충 졸업해야 하지 않을까?
결혼은 그 어느 누구와 바꿔치기할 수도 없고, 착각해서도 안 되는 유일한 남자와 여자와의 만남인 동시에 양가의 가족이란 그물 안에 편입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성인 남편을 가장 가까운 근친에 대한 호칭을 써서 부른다는 건 망측스럽기도 하거니와 기존의 조화로운 관계망을 혼란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설사 여자에게 오빠가 없다고 해도 장차 아들도 낳고 딸도 낳게 될 것이 아닌가. 여보 당신이 싫으면 서로 이름을 부르자. 이름은 자신을 존재케 한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과 꿈이 담긴 선물이고, 자신이 남과 다른 고유한 존재라는 걸 인식하게 한 최초의 울림이고, 자신이 지닌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이고, 무엇보다도 부르라고 지어준 것이다."
<박완서,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글 중>
다큐멘터리나 인간극장에서 어떤 주인공 할머니를 부를 때 "오늘도 영자 씨의 하루가 시작되었다."와 처럼 이름 뒤에 '씨'자를 붙여서 이름을 부른다. 이슬아 작가도 자신의 에세이에서 할머니를 존자 씨, 어머니를 복희라고 부른다. 여기서 불리는 이름들은 전혀 무례하다는 생각이 안 들고 오히려 친밀감과 존재감이 느껴진다.
이제부터 너의 존재를 담아 당당하게 너의 이름을 불러줘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