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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수록 글을 쓰자

에세이

by 문이


최명희의 혼불에는 청암부인의 시아버지가 나온다. 시아버지는 네 번이나 아내를 맞이하는 기구한 운명을 지녔다. 첫 아내인 반남박씨는 자녀 없이 스물세 살에 세상을 떠났고, 재취로 들어온 한씨 부인은 두 아들을 낳고 산욕열로 죽는다. 세 번째 부인 홍씨는 치장에만 열중하다 어느 날 자취를 감춘다. 청암부인의 시아버지는 거의 폐인이 되었고 종가의 농토는 모조리 탕진된다. 네 번째 부인 과수댁은, 열다섯 아들의 혼사를 치르기 위해 어머니가 필요해서 보쌈해 온 과부이다.

시아버지는 사력을 다해 아들을 혼인시켰지만 혼인하고 돌아온 아들까지 열병을 얻어 죽는다. 시아버지는 청암에서 비보를 듣고 소복으로 달려온 신부, 며느리에게 위로의 말 한마디 못해 준 채 바깥사랑에 시신처럼 거멏게 누워있다가 어느 날 유언도 없이 운명한다.


"그의 나이 이제 겨우 서른을 넘기었건만, 그는 속이 삭아 버려 텅 빈 고목처럼, 겉모습만 그렇게 의연한 척 남아 있는 셈이었다. 누가 밀기만 하면, 푸석 무너져 쓰러질 것 같았으나 상당한 날이 지나도록 그것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었다." (혼불 1부 1권, 93쪽)


900%EF%BC%BF20250315%EF%BC%BF120447.jpg?type=w966 통도사 입구에서 찍은 나무




저 부분을 읽는데 어렸을 때 시골에서 가까이 지냈던 한 분이 생각났다. 그녀는 두 아들과 남편을 병으로 떠나보냈다. 순하기만 했던 큰아들이 심장병으로 소년의 나이에 떠났고, 몇 년 후 징글징글했던 괴물스러운 남편이 폐병으로 떠났다. 남은 아들은 공부를 시키려고 일찌감치 대도시로 유학을 보냈으나 원인 모를 희귀병이 발병했다. 치료를 위해, 마지막 희망을 붙들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 보았다. 대학병원도 가보고, 신의 도움을 위해 기도원을 가보고, 좋다는 민간요법을 다 해 보았으나 결국 그 아들마저 피폐해지다 세상을 떴다. 가족이라곤 유일하게 딸 하나가 남았다.


그 가시밭길을 지나오며 그녀는 큰 소리로 말한 적이 없었다. 죄인처럼 늘 땅만 보고 다녔고 새벽부터 밤까지 일만 했다.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았고 여행도 가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녀는 크게 웃을 줄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900%EF%BC%BF1743290229344.jpg?type=w966 언니와 카페에서 추억을 회상하며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 에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살수록 사무치는 게 부모여도 결국 명치끝에 백혀 사는 것은 자식이라."

"부모는 죽으면 하늘로 보내도 자식은 죽으면 여기서 살린다. 영 못 죽이고 여기서 살린다."

"그들의 하늘이 무너지던 날 처음으로 무쇠가 무너졌다. 아비의 울음이 파도를 덮었다."


자식을 잃은 것만큼 큰 불행이 또 있을까? 너무도 큰 불행 앞에 사람들의 위로는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미 자신이 무너져버렸기에. 자기를 살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세월과 자기 자신 뿐이리라.


글쓰기가 치유의 역할을 한다는 내용의 책을 읽고 있다.

"힘든 시간을 글로 쓰면서 '나는 혹시 고통을 즐기는 사디스트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봤다. 덮어두고 살면 그만인데 굳이 상처를 들쑤시는 자신이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작업은 탁월했다. 손끝에 박힌 가시도 가만두면 신경을 건드리고 문제를 일으킨다. 아주 작은 심리적 문제라도 떨쳐내지 않으면 발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평생을 따라다닌다."

"누구에게도 터놓을 수 없는 아픔이 있다면 평생 절대 비밀을 고수할 사람 -자기 자신 -에게 털어놓아 보라, 쓰면 살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글쓰기가 필요하지 않은 인생은 없다 -김애리>


너무 힘든 시간에는 나를 놓아 버리고 방황할 수 있다. 힘들수록 글을 쓰며 나를 위로해 주자. 깊은 상처를 자꾸만 들여다 봐주고 피도 닦아주고 연고도 발라주자. 상처가 아물고 단단하게 여문 나를 보며 그래도 삶은 살만하다고 이웃에게 또 글을 써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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