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감각의 길 위에서
책상 앞에 앉아 머리를 싸매고 아무리 생각해도 문장이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런 날 나는 노트북을 덮고 밖으로 나간다.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익숙한 동네 도로변이나 공원을 천천히 걷는다.
걷는다는 건 그저 몸을 움직이는 일이 아니다. 멈춰 있던 생각들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고, 몸이 움직이니 마음도 따라 움직인다. 가슴께를 막고 있던 응어리가 서서히 풀리듯, 발걸음에 맞춰 내 안의 소음들이 가라앉는다.
걷기는 나에게 하나의 '열림'이다. 자꾸만 닫혀가려는 감각을 다시 열어주는 통로. 뇌가 굳었을 때는 다리를 풀어야 한다는 말을 체감한다. 한 발짝씩 천천히 내디딜 때마다 혈액이 순환되고 나의 감각도 환기된다.
책상 위에서는 막혀있던 문장들이, 걸으며 갑자기 선명하게 다가오고, 떠오른 생각을 놓칠세라 핸드폰 메모장에 조심스레 녹음을 한다. 집에 돌아오면 그 메모가 한 편의 글이 되고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 된다.
아래 글은 내가 어느 겨울 아침 산책을 하며 경험했던 것들을 적어 놓았던 글이다.
아침에 집을 나서서 도로변을 걷는데 찬 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공기 입자 하나하나가 얼어붙은 것처럼 쨍하게 차갑다. 올겨울 들어 오랜만에 맛보는 추위에 다시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도 해본다.
편의점에 들러 따뜻한 라테 한 잔을 산다. 30대로 보이는 이 집 여직원은 언제나 친절하고 곱다. 여느 가게에서 친절한 사람들을 별로 못 만나서일까 그 친절함이 좋으면서도 살짝 부담스럽다. 그런데 이 여자는 내가 갈 때마다 항상 말을 하고 있다. 전화로도 말하고, 오늘은 아는 사람이 와서 말을 쉬지 않는다. 카드 계산을 하면서도 말을 하며 나가는 내 뒤통수에 대고 "안녕히 가세요"라고 외친다. 이 여자는 말을 할수록 에너지가 소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전되는 것 같다.
전동 휠체어를 탄 아저씨가 담배를 꼬나물고 길 위에 멈춰있다. 아저씨의 친구인듯한 노란 티를 입은 강아지가 나를 보고 낯설다는 듯이 멍멍 짖는다. 아저씨가 줄을 끌어당기니까 휠체어 발받침에 한 번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간다. 강아지는 몸이 불편한 아저씨에게 둘도 없는 친구인가 보다.
가로수 아래 그늘진 곳을 걷다 보니 한 지인의 말이 생각난다. 엊그제 같이 요가를 다녀오는 길에 길가에 쌓인 눈을 보고 그녀가 말했다.
"야, 아직도 여기는 눈이 안 녹았네! 이상하다. 다른 데는 다 녹았는데 왜 여기는 눈이 쌓여 있는 거지?" 하고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늘져서 그래. 해가 비치는 곳과 그늘진 곳의 온도가 천지 차이야."
빨리 그늘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신호등이 나타나고 드디어 햇빛이다.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인다. 마스크를 벗으니 찬바람이 습한 얼굴을 강타한다. 공원을 지나니 햇살 가득한 길이 이어져 몸이 녹는다. 해님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평상시 지나치고 말았던 해님에게 새삼 감사함이 몰려든다.
양달과 응달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는 깨달음을 조금씩 체험해 가는 중이다. 행복과 고통, 기쁨과 슬픔, 물과 불, 부유와 빈곤. 그런 것들을 생각하다 보면 겸손함과 희망으로 내면의 무너짐을 막아내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지난번 눈비가 내린 후 담벼락 옆을 지키듯 서있는 단풍나무가 빨간 나뭇잎들을 피 흘리듯 한꺼번에 쏟아내었다. 오늘은 그곳이 말끔히 치워져 있다. 마치 비에 씻겨 내려간 것처럼. 모든 것은 계속 변한다는 것을 알아챈다.
올겨울 유난히 눈에 띄는 산수유나무에 그대로 매달려 있는 붉은 열매들. 햇빛에 반사된 빛을 쏘아내는 것이 빨간 구슬들 같다. 새들이 그 구슬들을 열심히 쪼아 먹고 있다. 그렇게 새들이 매일 배를 채웠을 텐데 열매의 양은 그대로인듯하다. 새들은, 자연은 자기의 양 이상에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공원 옆을 지나는데 참새들이 푸드덕 거리며 날아든다. 작은 나무에 앉은 참새 한 마리의 가슴이 둥글게 올라와 귀엽다. 수묵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이 정답다. 참새들은 먹고 사느라 늘 분주하다. 아니면 노느라 그러는 걸까?
예전엔 걷는 시간이 아까웠다. 그 시간에 무언가라도 더 얻고 싶은 욕심이 가득했다. 지식과 정보를 머릿속에 채우고자 귀에는 늘 무선 이어폰을 끼고 유튜브 방송을 재생했다. 오디오북, 북 리뷰, 영화 평론, 시사 뉴스까지… 걸으면서도 나는 정보를 소비해야만 했다. ‘가만히 걷는 시간은 낭비다’라고 생각했다.
길을 걸으면서 문득 예전 한 광고가 생각난다. 대나무 숲에서 한석규 배우가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했던 휴대폰 광고 문구.
귓가에 울려대던 소리를 끊어내고 시야에 들어오는 사물들에 집중하니 모든 것이 살아나 듯 풍성하게 다가온다. 이제는 욕심을 버리고 주변의 모습에 시선을 가져가 사색의 숲을 거닐어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