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 수 있다는 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나는 본업에서 PM으로 일하면서, 분 단위로 우선순위를 따진다. 이건 임팩트가 있는 일인가, 목표 달성에 기여하는 일인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인가. 이슈도 칼같이 자르고, 선택도 꽤 명확하게 하려 특히 요즘 노력한다. 제로 투 원이니까 더.
그런 내가, 사이드 프로젝트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친구들이랑 사이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다들 직장인이라 시간이 없으니까, 각자 AI로 원빌더가 되어 하나씩 맡아서 만드는 방식이었다. 나는 커리어 컨설팅 서비스를 맡았다.
내가 사람들한테 실제로 도움을 줬던 건 딱 두 가지였다.
첫째, 채용공고 추천. 나는 평소에 채용공고를 정말 많이 본다. 그래서 누군가의 성향과 경험을 들으면, 모두가 아는 빅테크만 던져주는 게 아니라 진짜 알짜배기를 찾아줬다. 작은 회산데 수익성 좋고, 도메인이 그 사람이랑 딱 맞고, 성장 가능성이 보이는 곳. 나만의 알고리즘이 있었던 거다.
둘째, 이력서의 첫 문턱을 넘겨주는 것. 사람들은 “이 회사 지원하고 싶다”까지는 간다. 근데 거기서 이력서를 열면 막막해진다. 써야지, 써야지, 써야지 하다가 채용 마감일을 놓치거나, 어디를 고쳐야 할지 모르니까 그냥 있는 그대로 내서 서류 탈락하거나. 이 심리적 이탈이 진짜 높다. 나는 그 허들을 낮춰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니까 핵심 기능은 두 개. 어쩌면 이 두 개를 엮으면 하나로도 풀 수 있는 문제였다.
MVP를 처음 낼 때는 가볍게 빠르게 나갔다. 거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내가 직접 만들 수 있게 되니까,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진 거다.
“커리어 성향 테스트도 있으면 좋겠다.”
“이런 재밌는 요소도 넣으면 사람들이 좋아하겠지.”
“이것도 되면 좋겠는데, 어 이거 만들 수 있네?”
떠오르는 대로 다 만들었다. 코드에 대한 종속성도 없다고 판단해서 병렬로 막 작업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엄청나게 기능이 많고 복잡한 서비스가 MVP라는 이름으로 나가 있었다.
AI는 실행의 속도를 올려준다. 그건 맞다. 근데 속도가 빨라지면, 생각과 실행 사이의 간격이 사라진다. 그 간격은 원래 “이거 진짜 해야 돼?“라고 스스로 물어보는 시간이었다. 그게 없어지니까, 판단이 속도에 묻혀버렸다.
판단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판단할 틈이 없었던 거다.
특히 나처럼 PM 경험 있고, 빌더 감각 있고, AI 쓰는 사람일수록 더 위험하다. 못 만들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다 만들 수 있으니까 다 만들어버리는 거니까.
뭐 하나 바꾸려고 하니까 종속성이 생겨 있었다. 빨리 피드백을 받아야 하는데, 종속성 정리하느라 시간을 쓰고 있었다. “빨리 실수를 수습하자”가 팀의 미션이 되어버렸다. PMF를 찾아야 할 시간에, 내가 만든 복잡성을 해체하고 있었던 거다.
나는 예전에 사업을 한 번 실패한 적이 있다. 그때 가장 크게 배운 건 “프로젝트를 무겁게 만들지 말 것”이었다. 그게 내 사이드 프로젝트의 제1원칙이었는데, AI가 그 원칙을 지키기 오히려 더 어렵게 만들어버렸다.
예전에는 개발 리소스가 병목이라, 자연스럽게 우선순위가 강제됐다. 못 만드니까 안 만든 거다. 근데 지금은 그 병목이 사라졌다. 다 만들 수 있으니까, 스스로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데 만드는 재미에 빠져서 브레이크를 잊어버렸다.
AI 시대의 사이드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역량은 “만드는 능력”이 아니라 “안 만드는 판단”이다.
AI가 실행의 마찰을 없애준 만큼, 우리는 스스로 마찰을 만들어야 한다. 만들기 전에 멈추는 시간, “이거 핵심이야?“라고 묻는 시간. 그게 없으면 속도는 나지만 방향을 잃는다.
지금 나에게 남은 할 일은 명확하다. 나머지를 걷어내는 것. 만든 걸 버리는 건 안 만드는 것보다 훨씬 어렵지만, 그게 지금 해야 할 일이다.
만들 수 있다는 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