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진 모든 재료를 꺼내보아요.
경력사항 칸에 뭐가 적혀 있는가. 회사명, 직군, 재직기간. 직군이 먼저 오고, 팀 안에서 내가 뭘 했는지가 그 뒤를 따른다.
근데 이 구조, 앞으로도 계속 유효할까? 나는 좀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Product Engineer, Builder, Problem Solver. 요즘 채용 공고를 보면 직군 명시 자체가 없는 포지션이 나타나고 있다. 엔지니어에게 PM처럼 사고하라는 요구가, PM에게 기술적이어야 한다는 기대가 동시에 생기고 있다.
실제로 최근 채용 도움 요청을 받은 회사 대표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케팅 인사이트가 있으면서 AI 툴을 적극 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인재
정확한 직군명은 안 쓰셨다. 마케터를 뽑는 건지, 기획자를 뽑는 건지 그 구분 자체가 이미 중요하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비개발자에게만 기술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개발자도 마케팅 팀에, 재무 팀에 배치된다. 양방향으로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이건 어느 한 회사의 실험이 아닌 것 같다. 점점 이쪽으로 가고 있다는 신호가 여기저기서 보인다.
한마디로, 직군 기술에서 역량 기술로 바뀐다.
예전에는 "나는 PM입니다. 이런 프로젝트를 리드했습니다"가 경력 기술이었다. 앞으로는 "나는 이런 문제를 풀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영향력을 만들어본 적 있습니다"가 경력 기술이 된다.
직군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와 밀도를 보여주는 거다.
포켓몬으로 비유하면 이렇다.
당연히 주종목은 있다. 불꽃 타입이면 불꽃이 주특기다. 근데 "불꽃만 쓸 줄 아는 포켓몬"과 "불꽃이 주종목인데 전기도 쓰고 비행도 하는 포켓몬"은 완전히 다르다. 배틀에서 선택받는 건 후자다.
주종목이 뭔지는 당연히 중요하다. 근데 그 +알파로 어디까지 영역을 넓혔는지, 그 밀도가 어느 정도인지, 실제로 어디까지 해봤는지 이게 전부 경력 기술이 되는 시대가 오고 있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게 있다. 그러면 할 수 있는 거 다 적어야 할까? 아니다. 절대 아니다.
상대방이 보고 싶은 것만 적어서 내야 한다. 상대방이 이 사람이 우리한테 맞는 사람인지 판단할 수 있도록. 피로하지 않도록 필요한것만 적어줘야한다. 이력서는 스캔이니까.
근데 핵심은, 그 보고 싶은 내용의 범위가 지금 정말 광범위해지고 있다는 거다.
요리로 비유해보자.
예전에는 파스타 전문점에 지원하는 거였다. 면 삶는 거, 토마토 소스, 크림 소스, 이 재료만 보여주면 됐다.
지금은 양식당에 지원하는 거다. 파스타는 기본이고, 스테이크도 구울 줄 알아? 리조또는? 디저트 플레이팅 감각은? 와인 페어링 대화는 할 수 있어? 보여줘야 할 범위가 넓어진 거다.
그렇다고 메뉴판에 50개를 다 올리라는 게 아니다. 이 식당이 뭘 원하는지 파악하고, 거기에 맞는 코스를 짜서 내는 거다.
근데 코스를 짜려면, 내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를 내가 먼저 다 알고 있어야 한다.
문제는, 대부분 자기 냉장고를 안 열어본다는 거다. 파스타만 만들어왔으니까 나는 파스타 재료밖에 없어라고 생각한다. 근데 막상 열어보면 예전에 스테이크 보조했던 경험, 디저트 시식하면서 쌓인 감각, 주방 동선 효율화했던 기억 다 재료다. 꺼내서 정리해놓지 않으면 코스를 짤 수가 없다.
개발자였어도 비즈니스 감각을 배운 순간이 있었을 거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어도 프로젝트를 직접 만져보고, 기술적으로 시도해봤던 경험이 분명히 있을 거다. 그게 직군 칸에는 안 들어갔을 뿐이지, 없는 게 아니다.
그걸 먼저 다 꺼내봐야 하지 않을까. 기억을 세세하게 꺼내서, 내가 어떤 재료를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 그게 시작인 것 같다.
그래야 어떤 식당이 와도, 어떤 회사가 와도 거기에 맞는 코스를 짤 수 있다. 자기가 어떤 역량을 가지고 있는지, 직군과 상관없이 풀어내서, 가시화해서 보여주는 능력. 나는 이게 AI 시대의 경력 기술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