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돌아온 다음 날

비우자마자 다시 잔뜩 채우기 시작했다.

by 셩PM

순례길에서 인생에 대한 깨달음을 가지고 왔다. 별거 아닌 깨달음이다. 그래도 나한테는 꽤 큰 거였다. 하나씩 내려놓으며 걸었고, 고요한 마음 하나를 만들어서 돌아왔다.


근데 아름다운 유럽의 풍경을 벗어나고, 귀국행 비행기에 올라탄 순간부터 다시 현실이 시작된다.

나는 용돈을 받은 적이 없다. 내가 벌어서 내가 여행을 가고, 내가 필요한 것들을 내가 채워왔다. 순례길에 쓴 돈도 전부 나의 자산이었다. 그 자산이 급격하게 줄어든 상태였다.


깨달음은 깨달음이고, 자금을 다시 확보해야 하는 현실의 벽이 눈앞에 있었다. 고요함을 유지할 수 있는 현실도, 꿈만 꿀 수도 없는 상황이 다시 직면했다.


치열한 삶의 시작

나는 귀국행 비행기를 탈 때마다 항상 하는 게 있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기 전, 미리 준비해둔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꺼내서 채용 공고에 지원을 넣는다. 그리고 비행기를 탄다.

비행기가 하늘 위에 있는 동안, 몇 개의 답이 온다.

한국에 도착하고, 유심을 꽂고, 화면이 뜨자마자 몇 개의 합격 문자를 보게 된다. 그 문자를 보고 면접 일정을 조정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 이게 나의 여행 루틴이었다.

한국에 오자마자 다시 치열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면접을 보고, 합격하고, 출근했다. 지금은 꽤 유명해진 여행 기업에 디자이너로 입사하게 되었다.당연히 풀 출퇴근. 재택근무 같은 건 없었다.


순례길에서 고요한 마음을 만들어 왔는데, 돌아오자마자 그 고요함 위에 다시 엄청난 것들을 쌓기 시작했다.


낮에는 회사를 다녔다. 그 외의 시간은 전부 창업 준비에 쏟았다. 순례길에서 그렸던 스케치를 꺼내서 서비스를 구상했다. 같이 할 사람들을 찾았다. 여행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면서 사업 아이디어를 나눴다. 여행하면서 모아뒀던 콘텐츠들로 인스타그램에 홍보물을 만들어 올렸다. 아이디어 피칭 대회도 나갔다. 친구들이랑 조각조각 프로토타입도 만들었다.

풀 출퇴근에 창업 준비까지. 바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근데 힘들지 않았다. 순례길에서 가져온 고요함이 그 바쁨을 버틸 수 있는 바닥이 되어줬다.


그러다 지원사업에 합격했다. 순례길에서 걸으며 품었던 창업의 열망. 그걸 사업계획서로 옮겨 적어서 냈고 열심히 설명했다. 그리고 합격했다. 큰 금액은 아니지만 마음에 큰 확신이 생겼다. 무엇보다 내 사업을 하고 싶었고 그게 여행업이기를 바랐다.


결심은 이미 되어 있었다. 합격 통보를 받자마자 정말 빠르게 퇴사했다. 고민할 게 없었다. (다음 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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