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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gela Dec 16. 2021

Via Negroli 2, Milano

모든 이야기의 시작



밀라노의 모든 이야기가 비롯되는 곳.


유일하게 거실이 있던 아파트, 그 거실에 간이 벽을 세워 만들어진 나의 방. 허술한 벽을 두고 놓여있던 소파. 우리의 소파.

밤이면 매일 모여 소파에 앉아 떠들거나 넷플릭스 시리즈를 보며 히히덕거리던 우리의 안식처.

1 유로짜리 화이트 와인을 주스처럼 돌려 마시며 취기에 젖어있던 기억들. 10년은 족히 넘었을 것 같은 소파, 한없이 꺼져가는 쿠션에 누워 눈을 감으면 광활한 호수에서 헤엄치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 어떠한 긴장감도 존재하지 않았던 유일한 공간. 나의 집, 나의 가족들, 나의 자리.


2018년 초, 교환학생을 신청했다. 스페인이 1 지망이었는데, 디자인이라는 전공에 맞추어 가기 위해선 미국과 영국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어릴 적 미국에 살았던 경험과 캘리포니아에 재학 중인 언니를 둬서인지 영미권 나라에는 큰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때문에 전공을 제쳐두고 갈 수 있는 학교들을 찾기 시작했다. 스페인의 경우 두 학교가 있었는데 모두 스페인어를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에 지원 불가능했다. 그나마 가까운 나라, 지중해를 나누고 있는 이탈리아가 눈에 들어왔다. 로마와 밀라노, 베네치아 세 도시의 선택지가 있었다. 베네치아는 작은 관광도시로 인식되어 미뤄두고, 도시라는 느낌에 보다 가까운 밀라노를 1 지망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Università degli Studi di Milano Statale, 이 학교에서는 정치외교학 교환학생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관련 전공과는 거리가 멀었던 나는 해당 학교 및 교환 담당 교수님께 직접 ’Statement of Purpose’를 보내야 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The world is becoming complex—society is compounded of not only individual majors but of various fields. In addition, industries are being linked to each other and expanding their fields. Therefore, even though my major is Visual Communication Design, I plan on learning politics, economy and business management.

Based on the experiences of numerous activities, (especially the cultural exchange programs and exhibiting club activities) I realized the importance of fund raising and sponsors. For instance, the club Seed of Art needed money to attract young artists and display their artworks in culture alienated regions. Through several attempts of contacting agencies, the club finally gained support and successfully accomplished a display. Hence, arts management has become the matter of primary for me. In addition, as I researched more deeply, I encountered the fact that as the importance and necessity of arts increase in the modern society, art management had become a worthy target for business. Thinking furthermore, to learn and obtain a related job, there needed to be basic and advanced knowledge about not only business but also economy and politics, since managing money cannot be apart from any of the three. Thus, I was certain that studying political, economic and social sciences in the University of Milan would be a great chance.

Milano, Italy is the optimum place to learn business and arts all together. The city is full of artworks and history, but at the same time, there has been a major development on publishing, finance, banking, information technology, logistics and so on. The place is especially famous for fashion design but tourism is also a well-developed field. This ‘tourism’ is always followed by arts—art is always within the tours. I was convinced by these points and decided to register for an exchange program in the University of Milan, although the majors offered in the university do not match my current one.


요약하자면, ‘모든 분야가 융합되는 사회 속에서 본 학생은 디자인, 미술이라는 전공을 넘어 그 외적인 분야의 공부도 필요함을 느낀다. 밀라노는 특히 예술이 발달할 도시인 동시에 산업, 특히 관광산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이곳에서 생활하고 공부하며 보다 많은 경험과 학습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공 외적으로 동아리 및 외부 활동을 통해 아트 산업에서도 경제학과 경영을 배우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아 이번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통해 이러한 점을 공부하려 하고, 따라서 본 학교와 수업들이 학생에게 적합하다.’는 맥락이다. 역시, 간절히 바라면 무엇이든 만들어진다.


밀라노 교환 프로그램에 합격하길 간절히 바랐으나 안될 경우를 대비해야 하기에 2 지망은 하와이 대학을 지원했다. 지원한 대학 리스트를 보면, 사실 전공에 대한 공부보단 그 지역의 문화와 생활에 대한 기대가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와이에 가게 된다면 서핑을 완벽히 연마해 오는 것이 목표였다. 그랬다면 또 어떠한 에피소드와 기억들이 생겨났을지, 상상해 보곤 한다. (하지만 결코 밀라노에서의 기억들만큼은 못했을 것이다.)

밀라노 대학에선 관심을 보였으나, 전공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서류를 여러 번 제출해야 했다. 가장 힘들었던 점은 밀라노의 (서유럽 전반의 특성인 것 같다) ‘느려 터진’ 일처리 속도였다. 회신을 받기까지 2주에서 3주, 1달이 걸리기도 했다. 어찌 되었건, 4개월에 걸친 기나긴 절차 끝에 승낙을 받아내었고, 그렇게 밀라노가 내게로 왔다. 아니, 내가 밀라노로 갔다.


9월 4일. 시작은 스릴러에 가까웠다.

부동산 (Net Servizi)에 찾아가 사전에 계약한 집 키를 받으며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은, 입주자들이 모두 남자라는 것. 시작부터 생활이 순탄치 않을 것 같았고 방문 키까지 받아 문을 무조건 잠그고 다녀야겠다고 다짐했다.


처음 집에 발을 들인 날, 토마스가 먼저 와 있다. 1인실 2개, 2인실 하나로 구성된 공간에 그는 1인실 입주자였다. 이탈리아 북부 출신이었던 토마스는 밝고 훤한 미소가 인상적이었다. 이 친구와는 생활에 지장이 없을 것 같다는 느낌, 플랫 메이트여서 다행이라는 생각. 하지만 도착한 지 하루 만에 토마스는 여행을 떠났고 그 크나큰 아파트에 홀로 남겨진 채 위험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모두가 입주하기까지는 대략 2주가 걸렸다. 다들 정확히 어느 날에 입주하는지 몰라 걱정스러운 마음에 집 문을 잠그지 않고 생활했다. 그들이 행여나 늦은 밤에 도착해 문이 잠겨있으면 갈 곳을 잃어 당황할까 문을 열어둔 것이다. 대신 화장실 문과 방문을 잠그고 생활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아시아 여성이 유럽에서 그렇게 생활한다는 것은 굉장히, 매우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이지만, 그때의 논리로는 그러했다. 모르는 나라의 모르는 도시에서, 모르는 아파트의 모르는 방에서 홀로 생활하는 시간은 설레기도 했지만, 답답하기도 했고, 무료하기도 했고 무섭기도 했다. 시차로 인해 한국의 친구들, 가족들과 시간이 맞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혼자’라는 상황을 살아오며 처음으로 경험한 느낌이었다. 특히 밤이 깊어 어두워지면 무서움이 극에 달했는데, 거실 불을 켜 두고, 방문은 잠그고 한국에서 가져온 애착 담요에 몸을 꽁꽁 말아 넣어 넷플릭스를 켜놓고 잠들었다. 공포와 공허함은 이탈리아 집의 특성도 한몫했던 것 같다. 차가운 돌바닥과 높은 층고는 무더운 나라의 낮에는 제격이었지만 밤에는 왠지 동굴처럼 변해 그 안에 해골이 되어버릴 것만 같은 상상에 빠지곤 했다.

넓은 공간뿐 아니라 버려진 집에 들어와 살아가는 이방인과 같은 상황이 모든 것을 더 공포스럽게 만들었다. 사용된 지 한참 되어 보이는 욕조에 들어가 물을 틀었는데, 하수구가 막혀 있었고, 그 하수구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머리카락이 때와 함께 잔뜩 끼어있었다. 겨우겨우 사용 가능한 욕조로 만들고 씻으려는데, 얼음장처럼 차갑고 따가운 물이 쏟아졌고 당최 따뜻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발가락의 그 길고 가느다란 털이 다 올라올 정도로 닭살이 돋을 대로 돋은 상태로 소리 지르며 씻어야 했다. 따뜻한 물에 가만히 서서 피곤함을 달래는, 수증기가 폴폴 나는 화장실 문을 열고 시원한 공기를 들이켜는 상쾌함은 꿈만 같은 일이었다. 고양이 세수하듯 몸을 닦고 우사인 볼트보다 빠른 속도로 달려가 침대에 깔아놓은 전기장판을 최대로 켜고 그 위에서 뒹굴었다. 전기장판은 과연 한국에서 가져온 가장 유용한 물건이었다.


9월의 밀라노는 8월의 한국에서 습기를 모두 앗아가 버린 날씨였다. 선글라스 없이는 눈뜨기 힘든 낮이었지만 높고 푸른 하늘과 건조하고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았다. 태양 아래는 뜨겁지만 그늘로 들어가면 시원한, 그런 날씨. 날이 이렇게 좋으니 사람들이 여유롭고, 호탕하고 게으르지..

길고 무료한, 공포스러운 밤에 잠들기 위해, 해가 뜨면 밀라노 도시를 걸으며 휩쓸고 다니며 에너지를 최대한 소모했다. 아파트는 도심에서 동쪽으로 조금 벗어난 곳에 위치했는데, 두오모까지 평균 사람들의 1.5배 속도로 걸어 25분에서 30분 정도 걸렸다. 처음에는 모르는 거리를 걷다 보니 두오모까지 가지도 못했다. 집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되돌아가지 못할 것 같은 조급함이 생겨 두오모를 코앞에 두고 (대략 5분 거리에서) 되돌아왔다. 내일은 꼭 두오모를 찍고 오리라, 다짐하며.

하루의 가장 큰 낙은 집 앞 마트에 가는 것이었다. 이곳에선 식수를 사서 마셔야 하기 때문에 마트에 주기적으로 가야 했고 무거운 병들을 들고 다니기 위해선 아파트를 고를 때 마트가 근처에 있는지가 중요한 선택 이유였다. Simply Market. 우리나라의 홈플러스 정도로 생각하면 되는데, 이곳에서 매일 저렴하고 싱싱한 과일, 고기, 다양한 파스타 면과 소스, 무엇보다 다양한 치즈와 와인을 구경하며 한 시간은 족히 보냈다. 인상 깊은 마트 문화 중 하나는, 소비자들이 손으로 직접 과일이나 채소를 만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비치된 자가분해 봉투(우리나라 마트의 비닐봉지와 같은 개념이다)를 사용해 손을 대지 않고 골라 담았다. 껍질째로 먹는 토마토 같은 경우 이러한 방식이 훨씬 위생적이고 상품에도 손상이 덜 가기 때문에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마트에서 판매하는 음식 중 기억에 남는 것은 푸룬과 치킨 가라아게. 맛있었을 뿐 아니라 간편했기 때문에 자취 생활에 적합했다. 와인은 뭐든 맛있었고, 치즈는 그 종류가 무한해서 매일매일 다른 치즈를 먹는 재미가 있었다. 집에 적응하고 나니 다음날 시도해볼 음식들에 설레며 잠에 드는 나날이 시작되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익히 알듯 영어로 소통 가능한 인구가 적다. 대도시인 밀라노도 예외는 없었기 때문에 안녕, 이것, 저것, 얼마예요, 고맙습니다, 실례합니다 등 기본적인 소통 언어들을 말할 수 있어야 했다. 특히 장을 보며 기본 단어들을 익혔는데, ciao! grazie mille, scusi, buon giorno 이 기본적인 네 가지 표현만 사용해도 사람들이 무척이나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초반에는 멀뚱멀뚱 쳐다보던 사람들이 그들의 언어를 조금만 사용해도 이렇게 친근하게 대하다니.. 우리나라에서 외국인이 (특히 다른 인종이) 한국어를 사용하면 좋아하는 모습과 같은 셈이었다. 억양을 빼면 시체인 이탈리아어는 같은 단어를 말해도 그 성조를 제대로 적용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했다. 성조의 정도는 중국어와 비슷했다. 높낮이가 크게 존재하지 않는 한국어와 영어가 익숙하다 보니 처음 이러한 억양을 사용하는 것은 어색하고 쑥스러웠다.

하루에 ciao는 적어도 열 번 이상은 사용했던 것 같다. 인사성이 바른 나라라기보다는 그만큼 열려있고 우호적인 문화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람들과 ‘안녕’을 주고받으며 금세 밀라노에 대한 두려움이 허물어졌다. 하나 ciao로는 허물어지지 않은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아파트 관리인이었다. 0층에 사무실이 위치한 그는 아파트를 들락날락거릴 때마다 마주치는 일이 잦았는데, 그가 매일 오전 복도 빗자루 질을 할 때 가볍게 ciao 혹은 고개를 까딱하고 지나치기 일쑤였다. 사실 이 정도도 한국에서는 나름 예를 갖춘 표현이지만, 현지인들은 언제나 밝거나 온화한 미소로, 하이톤의 ciao를 내뱉는데, 관리인과의 ‘안녕’은 그 느낌이 아니어서 불편하고 어색했다. 30대 초중반 정도로 보였던 관리인은 아랍계 남자로 영어를 전혀 못했고, 알아듣지도 못해서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친해지기는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나라에서의 또 다른 점은 길거리 노숙자들이었다. 도심뿐 아니라 외곽에도 노숙자들이 있었는데, 마트(Simply Market) 옆 모퉁이에 항상 자리 잡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그가 연주를 했었는지, 아닌지는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훤칠하고 건장한 흑인 남성이었고 인사성이 바랐으며 돈을 강요한다거나 험악한 분위기를 내뿜는 그런 무서운 노숙인은 아니었다. 유럽 사람들의 새로운 모습은 바로 그러한 노숙자들과 살갑게 인사를 주고받고 가진 동전을 모두 혹은 어느 정도 통에 두고 가는 행위였다. 유로는 2유로까지도 동전으로 있을 정도로 동전의 단위가 큰데, 그러한 돈을 당연하다는 듯 두고 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마 그래서 잔돈이 남는 마트 앞자리는 구걸에 제격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매일 걷다 보니 금세 빨래가 쌓였다. 처음 빨래를 하려 했을 때는 집 앞 동전 세탁실에 맡기려 했는데, 가득 찬 세탁바구니를 들고 거리를 방황하다 결국 세탁실을 찾지 못해 그냥 돌아와 버렸다. 집에 세탁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태가 좋지 않았고, 곰팡이와 먼지로 가득해 도저히 사용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세탁기는 화장실 안에 있었는데, 그 앞에 빨래 바구니를 놓고 변기에 앉아 혼자만의 딜레마에 빠져 좌절감을 느꼈다. 빨래가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이야. 한국에서는 그토록 쉬웠던 빨래... 방도가 없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올라오는 토는 삼키며 락스와 세제를 잔뜩 들이부어 세제통부터 드럼통 내부까지 씻어냈다.

집을 계약한 건지, 폐가를 계약한 건지… 세탁기 하나로 밀라노가 가장 후회스러운 순간이었다.

폐가에 인간미를 불어넣고, 집에서 도심까지의 지리도 익히다 보니 일주일이 금세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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