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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gela Dec 21. 2021

Via Negroli 2, Milano

파란 지붕의 파리... 여대문을 열고 활보하던 자유의 도시 파리

고등학교 친구 희수가 파리에 살고 있다. 당시에는 어학원을 다니고 있었고 현재는 대학을 다니고 있다. 밀라노에 와서 정신없는 일들을 (주로 입학서류 및 집 문제) 모두 처리하자마자 4박 5일로 파리행 티켓을 끊었다. 밀라노에 입국하고 약 일주일 후였다. 입주자가 아무도 없이 생활하다 보니 이렇게라도 친구를 만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고 일 년 넘게 보지 못한 친구였기 때문에 설레고 기대되었다. 유럽 내에서는 비행기 값이 싸서 15만 원 내로 타국을 왕래할 수 있다는 점이 정말 좋았다.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아 서울에서 도쿄를 가는 느낌이었다. 파리에 도착했을 때, 친구가 공항까지 마중 나왔다. 일주일 만에 보는 한국인, 게다가 친하고 편안한 내 친구가 앞에 있으니 그동안의 긴장과 굳었던 마음이 녹아내렸다. 평소 스킨십을 잘하지 않는데, 보자마자 와락 안았던 것 같다. 오프라인으로 사람에게 한국말을 사용하는 기분, 또 우리나라말로 그에 대한 답을 듣는 기분. 언어에서 느낄 수 있는 편안함.

파리의 지하철은 누군가 암모니아를 체취해 통에 담아 페브리즈인 양 구석구석, 아낌없이, 잔뜩 뿌려놓은 것 같았다. 이런 곳에서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앉아있는 사람들이 너무 신기했고 이미 익숙한 듯한 친구의 모습을 보니 티를 내면 안 될 것 같았지만, ‘억!’ 하는 소리를 감추진 못했다. 입으로 숨을 들이켜는 것 마저 불쾌한…

가까스로 빠져나와 예약한 한인민박에 짐을 놓고 나오는데, 이번엔 훠궈인지 마라인지, 중국 향신료 냄새가 진동했다. 프랑스의 한인민박은 대부분은 조선인들이 운영한다고 하는데, 숙박하는 곳의 주인도 조선인이셨다. 향수가 그렇게 발달한 프랑스인데, 어쩌다 발달한 것인지 알 것도 같은, 코가 피곤한 이동이었다.

첫날부터 시청과 노트르담을 관광했다. 봐야 하는 곳, 봐야 하는 것들을 보러 다니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어서 내키지 않았지만, 첫날만큼은 희수를 따라보기로 했다. 그 선택은 정말 옳았다. 노트르담에 갔을 땐, 성당 내부 입장은 바로 가능했지만, 옥상 관람은 대기표를 끊고 시간에 맞춰 기다려야 했다. 친구의 도움으로 대기번호를 받고 내부부터 관람했다. 유럽의 성당은 매우 웅장하다. 겉에서 보이는 것보다 그 내부가 훨씬 더 거대하고 커 보인다. 높은 층고, 넓고 긴 건물에 스테인리스 유리로 들어오는 빛과 따뜻한 촛불들이 공간을 감쌌다. 한국에서 다니던 동네 성당은 층고가 높고 넓긴 했지만 led 조명을 사용하는 신식 건물이기 때문에 유럽의 성당들과는 그 분위기가 매우 다르다. 노트르담은 작품 그 자체였다. 오래된 벽돌로 지어져 포근함도 가지고 있었다. 1유로에 초를 켜고 소원을 빌었다. 그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돌이켜보면 행복했던 기억들 뿐이니, 이루어진 것 같다.

시간 맞춰 옥상으로 향하는 줄에 섰다. 옛 건물이기 때문에 좁디좁은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라푼젤이 갇힌 것 같은, 미녀와 야수의 미녀가 갇힌 탑 같은, 디즈니의 모든 공주들이 갇힌 것 같은 탑을 빙글빙글 타고 올라가는데, 좁은 계단을 몇십 명의 사람들이 줄줄이 올라가 숨 막히고 멀미가 났다. 심지어 정상에 다다르기 직전에는 무너질 것 같은 나무계단을 올라야 했다. 하지만 정상에 오르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엄청난 장관 혹은 경치 때문은 아니었다. 성스러운 장소의 꼭대기에 서서, 조각 동물들과 키를 나란히 하며 프랑스, 파리를 내려다보는 기분. 파리의 하늘과 해를 눈높이에서 담는 느낌.

정상에서 내려다본 파리는 파란색이었다. 푸른빛의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도시를 형성하고 있었고 노란 볕이 건물의 외벽에 닿아 파랗지만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성당의 옆에는 센느 강이 잔잔히 흘러갔고 강가에는 사람들이 제각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기뻤다. 이 순간이, 불어오는 바람이, 기울어지는 햇빛이, 도시의 색감들이, 건물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가, 이 모든 것을 오감으로 체험하고 있는 순간은 기쁨이었다. 2019년, 비운의 사고로 노트르담 성당이 불타 버렸을 때, 이 기억과 감정을 떠올리며 함께 애도했다.




이날, 많은 것을 하진 않았다. 노트르담에서 내려와 센느 강을 따라 걷다 보니 희수의 숙소에 다다랐다. 어학원 기숙사였는데, 이곳에서 제공하는 급식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희수의 친구들과 가볍게 인사를 하며 희수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능숙하게 프랑스어로 다양한 인종의 친구들과 대화하는 모습에 친구가 다르게, 멋져 보였다. 밀라노에 머무는 동안 희수처럼 이태리어로 친구들과 대화하는 상상을 했다.



식사 후엔 어둑해진 센느 강을 걸으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밤이 되어 선선해진 파리의 강가는 음식점과 바의 노란 조명들, 저녁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과 공연 음악 소리로 메워졌다. 대학생들이 가에 걸터앉아 샌드위치와 맥주를 마시고 있었고, 큰 개를 데리고 러닝 하는 사람들, 다리 기둥에 올라가 포개어 앉아 (남자가 뒤 여자가 그 앞에 앉았다) 포옹하며 지는 해와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며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의 모습은 정말 로맨틱했다. 그 일원이 되고 싶었다. 어느 그룹이던, 다가가 말을 걸고 이야기를 나누며 술 한잔하고 싶게 만드는, 그런 저녁이었다. 낮에 각자의 삶을 살다 밤에 모여 담소를 나누며 편안한 시간을 보내는 문화. 밤, 저녁, 휴식은 파리인들에게 그런 의미인 것 같다. 센느 강 이후 어떤 거리를 걷고 술집을 찾아다닌 기억이 있는데, 정확히 술을 마셨는지 무얼 했는지 기억이 있진 않다. 아홉 시 즈음이 되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 기억은 선명하다. 길눈이 밝은 편이어서 희수에게 걱정 말라고, 잘 들어갈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하고 숙소를 찾아 떠났다. 하지만 낮에 봤던 거리와 어둑해진 거리는 180도 달랐다. 어딜 가나 같은 형태의 건물들이었다. 구글 맵에 의존하며 거리를 빙글빙글 도는데, 이곳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있다고 해도 으슥한 기운의 사람들, 아저씨들이 다수 있을 뿐이었다. 지도에서는 분명 도착이라고 떴는데, 숙소가 보이지 않았다. 30분가량 같은 거리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걷고 걷고 걸었는데, 원점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불안함과 초조함이 엄습해오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무서웠고 길 잃은 고아가 된 것 같았다. 말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았고 말 걸기조차 무서웠다. 눈물이 핑 돌았다.

하필 숙소가 위치한 곳에 가로등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는 돈 있는 부자, 우디 앨런의 이야기였다. 자정에 홀로 파리를 걸어 다닌다니, 모르는 차에 올라탄다니, 집은 어떻게 돌아오려고.

희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희수도 이쪽 지리를 잘 몰랐고, 어학원 기숙사 특성상 나올 수도 없었다. 그때 한국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국이 몇 시였는지, 무얼 하고 있었는지 몰랐지만 다급했다. 친구에게는 프랑스인 친구들이 있었고 계중엔 파리에 거주하는 친구도 있었다. 울먹이며 길을 잃었다고, 집을 못 찾겠다며, 너무 무섭다고 횡설수설했더니 친구가 파리에 거주하는 그의 친구와 연결시켜주었다. 해서 부랴부랴 파리 친구와 연락이 닿자마자, 숙소의 작은 문이 눈에 들어왔다. 낡아빠진 녹색 문. 그토록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숙소로 향하는 계단은 비좁았고 입구에서부터 찝찝한 향신료 냄새가 가득했다. 들어서자마자 비좁은 책상엔 불판 위에 고기가 수북이 쌓여있었고, 게스트 세명이 모여 다 끝난 것 같은 회식의 끝에 남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삼겹살은 무척 그리운 음식 중 하나였지만 기름에 튀긴 듯한 갈색의 고기가 차갑게 식어 산을 이루고 있는 장면이 입맛을 뚝 떨어지게 만들었다. 길었던 숙소 찾아 삼만리를 뒤로하고 내일을 위해 씻어야 했다. 다행히 늦은 시간대여서 대기할 필요는 없었다. 변기가 딱 들어맞을 것 같은 사이즈의 샤워실에 들어가 물을 틀었는데… 따뜻한 물.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뜨거운 물!!! 얼마만이었나. 행복했다. 뜨거운 물이 숙소에 대한 모든 반감을 잠시나마 누그러뜨렸다. 즐겨야 했다. 한참을, 한참을 서 있었다. 물을 피하지 않고 샤워할 수 있다는 현실이 감동이었다. 온 피부가 빨갛게 달아올라도 화상 입을 정도로 뜨거운 물이어도 좋았다. 만끽해야만 했다. 밀라노로 돌아가면 언제 다시 따뜻한 물을 누릴지 모르기 때문에. 30분 정도의 장시간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올라 깊은 잠에 들었다.





다음날 주인아주머니께서 인근에 새로운 숙소로 옮겨 주셨다. 자리가 남는데 그쪽이 더 편할 거라면서 옮겨 주셨는데, 사실, 비좁은 계단이나 작은 침대 등 마찬가지였지만 방은 조금 더 넓었고 여성전용 숙소여서 샤워하는 것도 비교적 편안했다.


이날 오전은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희수는 어학원 수업을 들어야 했기 때문에 스케줄을 마치고 오후에 만나기로 했다. 숙소 앞에 위치한 페스츄리점에서 달달한 빵을 집고 파리의 아침 거리를 나섰다. 여덟 시 반 경이었는데, 거리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 출근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딱히 정해 놓은 일정이 없어 우선은 루브르 박물관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양쪽 귀에 이어폰을 껴고 어제보다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걸으며 공원으로 보이는 길목에 들어서는데 어떤 용지를 들고 있는 프랑스인 세명이 접근했다. 타인이 접근하면 무조건, 무조건 조심하라고 희수가 말했었는데, 그새 그 말을 까먹고 기분이 좋아 천진난만하게 그들을 맞이했다. 유니세프 후원 설문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필요 이상으로 가깝게 다가와 나를 감싸버리는 바람에 당황해 몸을 비틀며 그들을 뿌리쳤다. 세명은 끈질기게 따라오기 시작했다. 공원에는 무슨 일인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도움의 눈빛조차 보낼 곳이 없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NO!’라 외치며 경보로 자리를 벗어났다. 따돌리고 나서 보니 가방이 열려 있었다. 미술관에 갈 것을 고려해 가방에 여권과 현금봉투를 담아왔는데. 황급히 가방을 뒤졌다. 아이폰 충전기, 보조배터리, 화장품, 빗 등 잡동사니들 아래 여권과 현금이 그대로 있었다. 가방이 너무 지저분한 덕을 보았다.

운 좋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건물이 예뻐서 찍었는데 알고 보니 오르세 미술관이었다.



루브르 박물관의 정원을 둘러보다 다리 너머에는 넓고 기다란 건물이 있었는데, 아침부터 그 앞에 나란히 줄 서있는 사람들을 보고는 궁금한 마음에 그 뒤에 붙어 섰다. 순식간에 줄이 늘어났고 뒤로는 수십 명 아니, 백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인원이 줄을 이루고 있었다. 건물로 하나둘씩 입장하기 시작했고 점점 차례가 가까워졌다. 들어서서 가장 처음 해야 했던 것은 짐 검사였다. 어리둥절한 상태로 앞에 사람들이 그러했듯 가방과 외투를 벗고 검사대를 통과했다. 짐을 찾아 들어서니 매표소가 있었다. Musée d'Orsay. 얼떨결에 들어선 건물은 다름 아닌 오르세 미술관이었다! 챙겨 온 여권과 밀라노 대학 교환학생 재학증명서를 보여주었더니 돈을 낼 필요도 없이 바로 입장이었다.

오르세 미술관을 처음 들어섰을 때, 계단으로 내려가기 전 그 광경은, 웅장함 그 자체였다. 거대한 건물의 가운데가 끝과 끝까지 뚫려 있었고 그 아래 수많은 작품들이, 입장한 인원보다 많아 보이는 작품들이 위치해있었다. 어릴 적 부모님이 말하지 않고 깜짝 선물로 놀이동산에 데려간 때 같았다. 올라타거나 만질 수는 없었지만 눈과 머리 그리고 마음이 가득 메워지는 그런 공간이었다. 경이로움에 빠져 한참을 돌아다니며 명작들을 감상하다 지치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모네가 떠올랐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 모네와 피카소. 거대한 오르세를 하루 안에 다 둘러보는 건 무리일뿐더러 남는 것도 없을 것이었다. 해서 우선은 모네를 찾으러 나섰다.

모네의 작품을 찾던 중 뇌리에 박힌 작품이 있었다.


In Bed (1892) by Henri de Toulouse-Lautrec

흐뭇함, 따뜻함, 마음이 채워지는, 사랑, 정겨움, 나른한 주말이 모두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한참을, 다리가 아플 때까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후 마주한 모네와 파카소의 작품들도 정말 좋았지만 이 작품이 그날, 오르세 미술관에서 뇌리에, 가슴에 박혀 파리라는 떠올리면 대표되는 작품이 되었다.

세 시간은 족히 보냈던 것 같다. 한참을 돌아다니다 지쳐 오르세 미술관의 가장 위층의 동그란 소파에 드러누워버렸다.



오감이 만족스러웠다. 혼자여서 느낄 수 있는 여유로움이었다. 점심 먹고 거리 구경을 하다 친구를 만나면 적당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나오려는데, 지퍼가 고장 나 터져버린 것이다. 하이웨이스트 청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가만히 서있으면 보일락 말락, 위험한 정도였다. 단추를 잠가도 소용없었다. 당황스러운 동시에 너무 슬펐던 건, 그 바지가 정말 좋아하는 반바지였기 때문이다. 우선은 급한 대로 챙겨 온 남방을 허리에 둘러 문제 부위를 가리고 황급히 오르세 미술관을 빠져나왔다.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h&m이 있었고 가던 도중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길목의 한 버거집에 들어갔다. 그 버거는 맛이 아닌 숫자로 기억한다. 20유로가 넘었던 것으로.. 물을 추가해 시켰다고는 하지만, 청담동에서 먹는 버거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 어쨌건, 허기를 달래고 새로운 바지를 찾으러 나섰다. 여대문을 열고 걸어 다니던 자유의 도시 파리.

가까스로 h&m 매장을 찾아 바지를 갈아입고 한국인, 아니 아시안이라면 누구나 들르는 ‘pharmacie’에서 친구가 올 때까지 시간을 때웠다. 정신없는 오전이 그렇게 훅 지나갔다.


친구와 만나서는 세포라 등 근처의 다양한 매장들을 둘러보다 화방에 들러 지퍼와 바늘, 실을 구입했다. 망가지 바지가 워낙 아끼던 바지여서 고쳐 입을 계획이었다.

평소 가고 싶었다는 식당을 들러 친구와 식사를 했다. 신기한 요리였다. 이후 파리지앵들 사이에서 유명하다는, 맛있다는 카페에서 카푸치노를 마시고 (기억나지 않는, 특별하지는 않은 맛이었던 것 같다) 쇼핑을 했다.


그날의 파리는 관광의 연속이었고 그 와중에 일어난 사건의 연속들이었다.

희수를 따라다녀 거리의 이름들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중 쇼핑거리가 기억에 남는다. 옷가게들과 향수 가게들이 연이어 있던 깔끔한 거리였다.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는 란제리가 패션의 일부이다. 해서 캘빈클라인 같은 기본 디자인 외에 다양한 색상과 무늬 특히 레이스 디자인의 란제리가 많았다. 한 매장에 들어서서 검은색의 브라렛 형태의 란제리를 구입했는데 처음에는 가슴이 밋밋해 보여 잘 입지 않았지만 자기만족의 개념으로 입었을 때, 예쁜 옷을 입거나 화장을 공들여했을 때와 같이 기분이 좋아 많이 찾게 된다.


둘러보던 중 한 향수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금빛이라거나 화려한 바틀이 아닌 원통형의 기본 투명 유리 디자인이었는데, 그 향에 반해버렸다. 조향사가 유명 브랜드, 샤넬 디올 등에서 조향 했던 분이라고 소개했는데 니치 향수 브랜드를 직접 설립해 판매하는 거였다. 아쉽게도 향수가 비싸다는 생각이 들어 구입하지 못하고 한참을 서성이다 돌아왔다.

이후 한국에 귀국해 중고거래 플랫폼에서 이 향수 브랜드를 발견해 바로 구매해 여전히 잘 사용 중이다. 비록 돌아와 구입한 향수지만 착향 할 때마다 파리의 거리가 떠올라 기분이 좋아지는 향이다.



한참을 돌아다니다 친구의 숙소에 들러 친구의 어학원 친구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휴게실에서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휴식을 취했다. 친구의 숙소는 ‘하인방’으로 ‘에밀리인 파리’와는 전혀 다른, 딴판의, 대략 4평 정도 되는 크기의, (170센티인 나에게는 정수리가 천장에 닿을락 말락 한 높이의) 공간이었는데 아늑하지만 작은, 작지만 평온한 공간이었다. 친구가 대단하고 기특하고 신기했다.

파리에 왔으니 에펠탑은 한번 보는 게 예의 아니겠는가. 친구 왈 에펠탑은 그 아래서 보는 것보다 센느 강 건너에서 보는 게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해서 정확한 길은 기억나지 않지만 친구를 따라 그저 그 목적지를 향해 갔다. 주황빛 노을이 지나가고 남색 밤이 찾아온 파리의 하늘 딱 그 중간에 에펠탑이 자리 잡고 있았다. 난간에는 관광객들이 줄지어 자리 잡아 사진을 찍고 있었고 길거리에는 바닥이나 계단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난간에 겨우 자리가 나서 황급히 빈틈으로 들어가 사람을 시야에 담지 않고 에펠탑 자체를 즐길 수 있었다. 에펠탑은, 거대하고 아름다운 조형물이었다. 뿜어져 나오는 빛으로 파리의 밤을 밝히는 그런, 조각상이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들어온 엄청난 감동이나 인상이 남은 것은 아니었다. 음료를 하나씩 들고 계단에 앉아 야경을 보며 담소를 나누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생활은 어떤지, 프랑스어 학습은 어떤지, 연애는 어떤지… 엄청나거나 인생이 뒤바뀔 정도의 큰 에피소드들이 있던 건 아니었지만 잔잔하게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엊그제 본 느낌처럼 친근했던 희수와 보다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희수와는 평소 성격이 정반대지만 고등학교 3년 동안 서서히 친해져 서로의 집을 쉽게 오가고 성인이 되어 각자의 길을 가면서도 문득 생각나면 쉽게 만나는 친구였다.

지금은 비록 다른 나라에서 다른 시간대를 살며 연락이 끊겨 서로의 생사를 아는 정도로 살아가고 있지만 희수는 내 마음의 파리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


 에펠탑이 반짝반짝 거리며 화려한 빛을 뿜어냈다. 잃어버린 숙소, 소매치기하려 했던 집시들, 고장 난 지퍼, 새로 산 바지, 실망스러웠던 음식이었지만, 파리와 조금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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