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16
운전연수를 마친 순간부터 홀로 운전하는 시간은 일상의 행복이었다.
차 없는 밤 도로를 달리는 것도 좋았지만, 막히는 도로도 나쁘지 않았다. 차는 나의 ‘personal space’였다.
초등학교 시절, 미국에 거주하며 유치원생들의 체육시간을 돕는 봉사활동을 했다. 하루는 체육관 바닥에 훌라후프가 이곳저곳 널찍히 놓여있었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그 안에 들어가도록 했다. 그는 그것을 ’personal space’라 칭했다.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개인공간. 친구도 연인도 가족조차도 넘어선 안 되는 선을 훌라후프라는 물체만 보는 아이들에게 알려준 것이다. 사춘기에 갓 들어선 난 그 시간에 ‘나만의 공간’, 동시에 넘어서는 안될 타인의 선에 대해 배웠다. 체육시간에 가르치는 예절 교육이었다.
우리나라엔 도덕이라는 교과과정이 있다. 도덕적 인간, 도덕적인 사회 구축이 그 목표였을 테다. 하지만 우습게도 부모님의 보호를 벗어나 성인이 되어보니, ’ 도덕‘이라는 과목이 개개인에게, 무엇보다 나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유교사상을 근간으로 ‘인의예지’를 소리 내 외우던 모습이 떠오른다. 어질고, 의롭고, 예의 있고, 지혜로운 것. 도덕 수업의 뿌리가 되는 사상이었다. 예의는 국어에서도 배운다. -님,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등 갖은 존칭을 사용하도록 한다. 유치원 시기까지 포함하면 15년 동안이나 우리는 ‘도덕’을 교육받았다.
하지만 표면상 예의를 갖추곤 타인의 선을 무시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친구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친구 혹은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은 더 했다.
그렇다고 미국이 도덕적인 사회라 칭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보기엔 도통 이해되지 않는 행동도 많다. 우리나라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되려 미국인들이 친절해 보이지만 차갑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짐작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의 ‘스몰 토크’가 어색하다고 한다. 이건 분명 문화 차이다. 그들의 스몰 토크는 인사 예절 같은 것이다. 하지만 하고 싶지 않다면 짧은 답변으로 넘길 수 있다. 시작한 쪽도 별생각 없이 넘길 것이다.
훌라후프로 돌아와 본다. 우리는 각자의 훌라후프를 만드는 법도, 그 존재도, 타인의 훌라후프의 존재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 선 넘지 말라 ‘는 말이 존재하는 걸 보면 분명 개인의 선에 대한 추상적 개념은 존재한다.
선은 암묵적으로 지켜야 하는 정도와 육성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것들이 공존한다. 현대 사회에선 마땅히 지켜져야 할 선도 육성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선뜻 말하지 못한다. 혹은 선을 넘는 행동을 당연한 일이나 단순 오지랖 정도로 생각하기도 한다.
‘꼰대’라는 말이 흔히 사용되는 것은 큰 변화라 생각한다. 각종 미디어에서 사회의 모순을 비꼬아 표현하는 일종의 우리나라식 블랙 코미디다.
주변엔 유학하거나 해외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많다. 20대 후반, 30대 초중반 친구들에게 돌아와 일할 의향을 물으면 열 명 중 아홉은 고개를 젓는다.
“나이가 들면, 사십오십쯤 돌아갈지도 모르지.”
운전이 좋다. 핸들을 잡은 이들은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반대편 차로 또한 한 방향으로 달린다. 차간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 위협을 느끼지 않도록, 암묵적인 규칙안에 움직인다. 도로에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할 것이라는 신뢰가 있다. 그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