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도 지랄, 저래도 지랄, 모두에게 맞는 조언은 없다
몸에 이상증세들이 생겼다. 이 병원, 저 병원 다녀봤지만 몸에는 이상이 없다고 한다. 의사 선생님들이 공통적으로 물어보셨던게 ‘최근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나요?’였다. 그러고는 스트레스를 잘 관리하라고 말씀하셨다.
스트레스는 안 받고 살 수가 없는 것 같다. 인간이 살아있는 한 외부의 자극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스트레스는 느끼기 마련이니까. 근데 몸이 이렇게 된거면 뭔가 문제가 있다 싶었다. 변화가 필요하구나. 난 뭐 때문에 가장 스트레스를 받아왔을까.
생각해보니 나는 늘 나를 혼냈다. 나는 성숙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고,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근데 어느 시점부터는 혼란스러웠다. 기준이라고 할만한게 참 애매했다. 무슨 기준에서 성숙한 사람, 좋은 사람, 멋진 사람을 판별한단 말인가.
현대인들은 하루동안 얼마나 많은 조언들, 그리고 타인의 가치관들을 접하면서 살아갈까? 가족들, 주변 친구들, 어쩌다 만나게 되는 그냥 지인들 등등 현실에서만 해도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타인으로부터 듣게 된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키면 더 하다. 유튜브나 밀리의 서재 어플을 열면 각종 성공한 사람, 인정받는 사람, 그리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이게 맞다, 저게 맞다 하며 수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과거의 유명한 철학자들 이야기까지 빼놓을 수 없다.
나는 욕심이 많아 그 이야기들을 다 흡수하고 배우고 싶었다. 문제는 욕심이 과했나보다. 나는 그 목소리들을 내재화했다. 그런데 문제는 충돌하는 목소리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자기 자신에게 친절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러면 위기가 온다고,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고 채찍질해야 한다고 말한다. 누구는 인간관계야 말로 인간이 이 땅에 내려와 사는 삶의 이유라고 말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면서 말이다. 그런데 누구는 타인에게 잘보이려하지 말라고 한다. 관계에 집중하기 보다는, 자기 일에, 그리고 자기 자신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누구는 그러면 그건 또 불가능하고 비인간적인 것이라며, 솔직한 마음을 인정하고 신경쓰면서 살라고 한다. 누군가는 자기 자신의 삶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사람들을 손절해야 한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함부로 손절하면 성장할 수 없다고, 관계와 갈등들을 직면하고 타인을 이해하고 조율하며 배워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하고, 누군가는 잘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한다. 누군가는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때론 분출하고 나누는게 건강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그게 부정적 감정을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증폭시킨다고, 위험하다고 한다.
누가 틀린걸까? 뭐가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그건 그냥 가치관 차이일 것이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거의 7년을 조언 콜렉터, 가치관 콜렉터로 배우면서 살려고 했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냥 뭐가 대단히 틀린 것 같지가 않다. 이 생각 또한 시간이 흘러 변할 수 있지만. 나름 다 각자의 탄탄한 논리가 있고, 그 논리를 가능하게 해주는 전제가 있고, 실제 사례들도 있고,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경험들, 주변에서 직접 보고 들은 것들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각자 논문도 있고, 실험 결과 등도 있다. 결국 헛소리를 하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름 다 진심이고, 일리도 있다. 근데 그냥 세상이 그렇게 생긴게 아닐까 싶다. 너무 다양한 기질의 사람이 있고, 너무 많은 우연적 변수들이 있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각자의 너무 다양한 경험들이 있다. 세상이 너무 넓고 너무 별의별 사람이 다 있고, 별의별 일이 다 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고 한들, 어떻게 이 세상에 대해 다 이해하겠는가 싶다. 어쩔 수 없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또 지금껏 봐온 대로 보고, 이런 오류들이 누구에게나 작동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고 한들. 우리 삶의 효율성을 위해서는 어느정도 일반화나 법칙화도 필요한데, 정확한 진실만을 추구하다가는 이게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명적인 반례가 없는 경우는 거의 없을 테니까. 영화 <굿 윌 헌팅>의 숀 교수와 램보 교수의 의견이 다르듯, 둘이 같은 사안에 대해 떠올리는 사례가 다르듯, 나름 현명하고 똑똑하고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라고 해도 뭘 정확히 알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냥 한 명의 인간일 뿐이니까, 한 명의 인간이 이해하기엔 이 세상이 너무 복잡하고 모순투성이니까(세상이 모순 투성이라는 말을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유튜브에서 들었는데, 굉장히 와닿아서 인용해봤다).
이게 양비론 양시론처럼 보일 수 있다. 양비론이나 양시론은 한계가 명확하다는 것도 안다. 근데 내가 보기엔 그냥 세상이 그렇게 생겼다. 그리고 지금은 이런 저런 단호한 목소리들에 좀 지친 것 같기도, 질려버린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생각해보니 내가 열심히 잘 살아보겠다고 마음먹은 때부터 늘 나를 혼냈던 것 같다. 꽤 긴 시간이었다. 꿈을 쫓으면, 지금 현실을 쫓고 리스크를 줄여야지, 철 없이 뭐하는 것이냐며 스스로를 거칠게 질책했다. 외면하려고 해도 내면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다시 이런 저런 이유로 현실을 쫓으려고 하니, 다시 그럴거면 왜 시간 낭비를 했으며, 누군가는 아랑곳 않고, 자신의 길을 가서 원하는 길을 개척하는데 너는 뭐하는 거냐며, 그 정도 배포도 없냐며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주변사람의 시선에 신경쓰고, 관계에 집중할 때면, 왜 그런 공허한 것들에 집중하고 스스로에게 집중하지 않냐며, 후회할 것이라며 스스로를 혼냈다. 내 일에 좀 더 비중을 두고 나에게 몰입하는 시기를 가지려고 하면, 그건 인간의 삶을 가치있게 하는 것들이 아니라고, 인간의 솔직한 감정에 집중하고 타인과의 관계에서의 감정과 가치들에 신경써야지,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고 자신을 압박했다. 사실 내가 이러고 있는 줄도 몰랐다. 몸이 망가지고 스트레스를 공통적으로 지적받고 나서야 알게되었다. 나 스스로를 되돌아보면서 말이다. 정말 이래도 지랄, 저래도 지랄이었다(인터넷 서핑하다가 알게된 말인데 진짜 많이 와닿았다). 이런 태도가 극단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나름 중용을 추구하게 했을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몸이 망가졌다. 그냥 결정적으로 더 이상 내가 이러고 싶지 않아졌다. 그리고 그럴 수 있지도 않을 것 같다. 후에 추가로 이야기 하겠지만, 더 이상 이전만큼 타인의 말에 대한 환상도 없어졌다. 왜 근데 이전엔 이런 과정들을 멈출 수 없었을까? 그건 아마 뭐 하나를 놓치면 큰 일 날 것 같다는, 또, 편협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극도의 두려움 때문이기도,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어하는 지나친 욕심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한 동안 그런 것들을 안 보다가 다시 책들과 유튜브 등을 보니 여전히 ‘절대 ~(어떤 어떤)식으로 살면 안된다. 정말 큰일난다’고 말하는 메시지들이 보였다. 누군가는 굉장히 단호하게 그렇게 말한다. 사실 내 혼란은 몸이 아프기 이전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누군가는 잘못되었다는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도 시야를 넓혀서 둘러보니 은근히 있어왔기 때문이었다. 근데 별로 잘못된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이 별로 불행해 보이지도 않았다. 혼란스러웠다. 아니, 나는 그 말에 설득력을 느꼈는데 누구는 그냥 그렇게 사는구나, 별 문제 없이, 별로 불행하지도 않게. 그냥 결정적으로 내가 직접 보니 내 솔직한 마음이 이야기했던 것이다. 이걸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느냐고. 책 한 권 읽은 사람이 무섭다는 말이 생각났다. 어떤 한 가지 잣대로, 논리로 이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인가. 사실 내가 무언가에 꽂혀있던, 늘 반대를 이야기 해 온 사람은 있었다. 그 주장, 논리, 근거 또한 듣고 보면 설득력 있을 때가 굉장히 많았다. 그러면서 자주 한 가지 가치관에 꽂혀서 세상 다양한 것들을 그 잣대로 판단하려고 했으니, 머릿 속에서 에러가 자주 났던게 당연했구나 싶다. 그냥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르다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였다면 좀 편했을까? 근데 당시에는 보편적 진리를 찾고 싶다는 욕심이 커서 그런 생각에 집중을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늘 이런식의 비슷한 혼란을 반복했었다.
애초에 성숙한 사람, 좋은 사람으로 살고 싶어서 이래왔는데, 이제와서는 대체 어떤 사람이 성숙한 사람인가 싶었다. 어떻게 살아야 좋은 사람인 것인가. 그냥 지금 생각하면 웃긴 질문이다. 내 생각에는, 아무도 모른다. 그냥 자기 자신에게 맞는 어떤 방법들을 좀 잘 아는 사람들은 있는 것 같다. 근데 애초에 인류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기준들, 방법들을 아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애초에 존재할 수가 있을까. 그건 오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 다른 사람들이 많다. 너무 다른 환경들이 많다. 세상 일에는, 각자의 인생에는 너무 다른 변수들이 많다. 사실 이런 식으로 생각이 좀 바뀌고 나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답이 있다는 것은 다양성과 자유라는 가치에게는 사망선고가 아닐까하는. 획일화된 세상, 특정 가치관이 독선적으로 지배하는 세상만큼 아름답지 않은 세상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애초에 ‘아름답다’가 ‘나답다’라는 뜻이라는데 요즘만큼 와닿는 때가 없다.
나는 귀가 얇은 사람, 예민한 사람, 타인의 말에 신경 많이 쓰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 과정들이 결국은 겪어야 했을 성장통이 아닐까 싶다. 아마 내가 이런 과정을 겪고, 이런 사고의 과정을 직접 겪지 않았다면, 모두에게 찰떡같이 잘 맞는 조언은 없고, 결국 본인이 선택하고 개척해나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도 머리로만 이해했을 것 같다. 긴 시간 고민, 경험들 끝에 타인의 말들에 대한 환상이 많이 사라졌다. 독선적인 사람이 될까 두려워 계속해서 이런 저런 말들에 굉장히 귀를 기울였지만 그게 지금의 나에게 별로 적합한 방향성은 아닌 것 같다. 독선적인 사람이 될까 걱정하는 것도 지금의 내가 하기에 적당한 고민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귀를 닫고 살고 싶지는 않다. 세상에는 여전히 멋있는 사람들, 현명한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배울만한 메시지들, 태도들도 많다고 생각한다. 근데 그냥 결국 그건 나의 것이 아닌 것 같다. 배움이 되고 재료가 될 수는 있지만, 내 지혜는 내가 만들어야 하는 것 같다. 굉장히 긴 시간 혼란스럽고 괴로웠지만 이젠 후련해졌다, 아주 많이. 여전히 혼란스럽고 무섭기도 하지만, 앞으로는 자유롭게 나만의 것들을 쌓아나가도 된다는 생각에 설레이기도 한다. 이래도 지랄, 저래도 지랄이라면 사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아닐까 싶다(혹시나 오해의 여지가 있을까 해서 말하면 윤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앞서 기술한 여러가지 삶의 방식, 태도에 대한 이야기이다). 찾아보니 요즘은 이런 생각을 '낙관적 허무주의'라고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관련된 영화로 이전에 재밌게 봤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영화가 다시 보고 싶어졌다. 시간 날 때 다시 챙겨서 한 번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