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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Dec 25. 2019

나는 당연히 준비된 좋은 엄마지

개뿔.....

 어릴 때부터 아이를 좋아했어요. 그래서 막연히 저는 좋은 엄마가 될 거 같았어요.(이 근거 없는 자신감의 출처를 모르겠네요)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만 하면 바로 행복한 임산부가 될 줄 알았는데 1년 반이 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더군요. 그럴수록 육아서를 더 읽었고(왜?) 훌륭한 엄마가 될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은 점점 확고해졌지요.(왜?? 왜??) 


  그 기다림 끝에 드디어 엄마가 됐지만 내 준비와 현실은 아무 상관이 없더군요. 2시간마다 일어나서 밤잠의 정의가 모호해졌고요. 모유수유가 아니라 혈유수유를 하더군요. 거울 속의 나는 탈옥수 같았고요. 상황이 이지경이면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저는 제 독서가 부족해서 생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쳤나 봅니다)


그때 만난 책이 <베이비 위스퍼>였어요. 아이를 눕혀 재워서 스스로 자는 것을 배우면 안 깨고 길게 잔대요. 그 말에 눈이 번쩍 뜨여서 얼마나 열심히 읽었나 몰라요. 결론은? 다들 눈치챘겠지만 애 잡을 뻔했어요.  <베이비 위스퍼>가 나쁜 책이라는 말은 절대 아니란 거 아시죠? 되는 아이도 분명 있을 거예요. 제 친구 아이는 됐거든요. 다만 아이가 자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고 누구에게는 맞는 게 누구에겐 아닐 수도 있다는 거죠. 그때 처음으로 육아서를 버렸어요. 


  그 짧은 신생아 때의 경험으로 육아서가 전부는 아니라는 걸 알았어야 했어요. 그런데 먹고 재우는 그 시기가 지나자 또 슬금슬금 육아서를 모으대요.(또 왜....) 맘 카페에 의존해서 아이의 증상을 물어보고 그 댓글 따라서 널뛰지 않은 건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책 따라 널뛰는 건 똑같아요. 댓글보다 책 읽는 게 시간이 좀 더 걸리니 그 널뜀의 주기가 약간 길다는 것뿐. 


  정말 열심히 읽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이런 정성으로 공부를 했어야지 싶을 만큼요. 그런데 읽어도 읽어도 어찌 된 일인지 육아는 더 어려웠고 내 죄책감만 늘어가더군요. 하루 15분 내 아이를 생각했는데도 자애로운 엄마가 되지 않았어요. 큰아이를 천재로 키워낸 아빠의 말대로 내면 여행을 해도 이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습니다. 어느 의사 선생님은 아이와 함께 자라는 부모라고 했는데 자라는 부모가 되려면 일단 많이 참고 기다려줘야 하더군요. 그 많이 참고 기다리는 거 자체가 안되는데 어떻게 자라나요. 책 속의 이상적인 엄마 모습은 나와 너무 다르고 이 '다름'은 '틀림'이 되어 나를 얽맸어요. 내가 만든 화살에 내가 찔려 혼자 아팠습니다. 그렇게 좌절하다가 나의 타당성을 만들기 위해 엉뚱하게도 육아서의 작가들을 뒷조사했지요


  '그럼 그렇지, 애 하나네. 하나면 나도 해. 한 명만 비위 맞춰주면 되잖아.' 

  '애가 둘인데 왜 둘째 얘긴 없어? 둘째는 그렇게 못했나 보네? 그럼 큰 애한테만 적용되는 거잖아.' 

  '어머, 친정(혹은 시가)이 가깝네. 그럼 조부모 도움이라도 받겠지. 나처럼 혼자 뚝 떨어져 봐야 저런 소리 안 하지'

  '부모 둘 다 명문대 출신이네. 유전자의 시작 자체가 다르잖아' 

  

 그렇게 나만 안 되는 거에 대한 이유를 찾았어요. 잠깐은 내가 위로가 되더군요. 그런데 얼마간 하다 보니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습니다. 아, 이건 모지리의 끝판이구나. 내가 이 짓을 그만두려면 아예 육아서를 끊어야 되겠다, 깨달음이 오더이다. 그날로 모든 육아서를 내다 버렸습니다.


    홀가분함도 잠시, 줄곧 읽어대단 가닥이 있는데 읽을 게 없으니 허전했어요. 꼬물이 둘을 데리고 서점 쇼핑을 하러 가기엔 엄두도 안 나서 우선 집에 있는 성경을 읽었습니다. 성경은 어렵고 딱딱한 책인데 종교를 벗고 읽으니 의외로 재밌었어요. 그전에 절대 느끼지 못했던 육아 이야기가 성경에서 보였거든요. 성경에서 육아서를 느끼다니 아이러니했지만 성경 속의 육아는 내가 틀리다는 죄책감을 주지 않아서 담백했어요.


  그때 알았습니다. 

특정 시기와 관계에 초점을 맞춘
육아서보다
그냥 인간 자체를 이해하는 게
훨씬 낫구나. 

누구는 기껏 육아서를 버려놓고 다른 책에서 또 육아를 찾느냐고 하지만 육아서 밖의 육아서는 나도 키우고 아이도 키우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어요. 그렇게 성경에서 다른 고전으로, 일반 에세이로 읽기의 폭이 넓어지면서 내 육아 스트레스는 줄어들었습니다.




  

 지금도 물론 육아의 답은 몰라요. 아이가 사춘기를 겪으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는데 아직 그 전이라서 더 모르겠습니다. 아이의 사춘기가 쎄게 와서 지금의 이 글을 보며 '나님, 그 입을 다물라' 하고 머리 뜯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사춘기도 여하튼 인간의 삶에서 지나는 한 부분이 아닌가요. 사춘기로 지지고 볶을 때 우연히 내 아이가 이 글을 읽는다면 엄마가 날 이해하기 위해(혹은 나를 잘 키우기 위해) 이런 노력을 했구나.로 받아들여주면 좋겠어요. 아, 사춘기 당시에 아이가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겠죠? 아주아주 나중에 스치듯 그런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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