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에 대처하는 엄마의 자세
방학입니다. 애 둘이 종일 집에 있으니 집이 깨끗해질 틈이 없습니다. 애들이 없으면 집이 깨끗하냐고요? 그 질문은 못들은 걸로, 안 들은걸로 칩시다.
싸우지 않고, 엄마 부르지 않고 3시간 잘 놀면 30분은 게임을 시켜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래놓지 않으면 둘이 5분 간격으로 엄마를 불러대서 도통 제가 뭘 할 수가 없거든요. 애들이 엄마를 찾지 않으면 빈둥지 증후군에 걸린다고 하는데 과연 저도 그럴까요. 지금 마음으론 절대 안 그럴거 같은데 말입니다.
아이들에게 완벽한 청소를 시키기는 어렵습니다. 실제로 청소는 고도의 정신작용이래요. 일의 순서와 배치를 추상적으로 구상해야 되서 그렇다고 합니다. 하지만 청소 말고 정리, 그 중에서도 제자리에 물건을 갖다 놓는 것은 돌쟁이 아가도 할 수 있는 일이지요. 저도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청소는 사용이 끝난 물건을 제자리에 갖다 놓는 단순한 일입니다. 10살이 된 지금보다 아장아장 걷는 십 몇 개월 때 더 잘했던거 같은 느낌은 제발 그냥 느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텔레비전 보면서 마셨던 물컵, 젤리 껍데기, 신던 양말 등등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 최대한 건조하게 '이거 갖다 놔라' 라고 말합니다. 말하면서 늘 생각합니다. 대체 몇 번 말해야 끝나는 일일까요. 이렇게 말하는게 끝날 날이 과연 오긴 올까요. 우리집만 이럴까요. 다른 집 애들은 바로바로 치울까요. 남의 집 아이들이 어느 학원 다니는지는 안 궁금한데 이건 정말 궁금합니다.
도무지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아이들의 물건들 앞에서 여리고성을 돌던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합니다. 구약성서 여호수아에서 신이 여호수아에게 말했어요.
"내가 여리고성과 그 왕과 모든 군인들을 이미 네 손에 넘겨 주었다. 너와 너의 모든 군대는 여리고성 주위를 6일동안 매일 한 바퀴 씩 돌아라. 제사장 7명이 각자 수양의 뿔로...(어떤 방법으로 돌지 설명합니다)...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너희가 그 성을 일곱 바퀴 돌아야 한다. 제사장들이 나팔을 한 번 길게 불면 모든 백성이 큰 소리로 외치게 하라. 그러면 그 성벽이 무너질 것이다"
여호수아와 그의 백성들은 7일차에 성이 함락될 거란 말을 믿고 여리고 성을 하루에 한 바퀴 씩 돕니다. 하지만 6일차까지 여리고성은 굳건합니다. 돌멩이 하나 떨어지지 않았어요. 7일 째 되는 날에 전과 같은 방법으로 성을 일곱 바퀴 돌았고 제사장의 나팔 소리를 듣고 일제히 큰 소리로 외치니 갑자기 성벽이 무너집니다.
정말 여리고 성이 6일동안 돌고 7일차에 소리 질렀다고 무너졌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어요. 제가 본 건 어찌됐든 6일차까지 아무 변화가 없다는 지점입니다.
매일 말해도 한치의 변화도 없는 아이들을 보며 내가 뭘 잘못 가르치고 있나, 아님 소용없는 일에 내 진을 빼고 있나, 그냥 내가 움직여서 치워야 하나 생각을 한 적도 있거든요. 그런데 7일차에 무너진 여리고 성은
매일 조금씩 변화하지 않아도 꾸준히 하면 어느날 갑자기 될 수도 있구나
라는 희망을 줍니다. 조금 바꿔서 보면 물컵이나 양말이 제자리에 가는게 조금씩 발전하긴 어려운 일이에요. 양말 몇 백 켤레가 하나씩 세탁기로 가는 것도 아니고 하루에 고작 한 짝 인데 그게 매일 발전하긴 어렵잖아요. 내가 벗은 양말은 내가 갖다놔야 한다...가 어느날 인이 박히고 행동까지 인이 박히면 한 번에 이뤄질 일입니다. 여리고성이 한 번에 무너지지 않고 매일 조금씩 무너졌다면 성 안의 사람들도 뭔가 조치를 취했겠지요. 그러면 성이 그렇게 무너지지 않았을테고요. 일에 따라서 조금씩 발전할 수도, 아님 수면 밑에서 보이지 않게 준비하다가 한번에 확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양말 한 짝, 물 컵 하나에 너무 비장해보이나요. 사소하지만 내 주변을 내가 정리할 수 있는 '어른력'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생각보다 이거 못하는 어른 너무 많잖아요.
이런 잔소리를 한 지 3년차인데 여리고성이 6일동안 변화 없었으니 저도 6년을 채워야 제 말 없이 양말과 컵이 제자리를 찾을까요. 아예 그렇게 마음을 놓아버리니 차라리 편합니다. 그렇게 오늘도 저의 여리고 성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방학이라 하루에 두 세 바퀴는 더 돌아야 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