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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Dec 27. 2019

당신의 여리고성이 있나요.

방학에 대처하는 엄마의 자세

방학입니다. 애 둘이 종일 집에 있으니 집이 깨끗해질 틈이 없습니다. 애들이 없으면 집이 깨끗하냐고요? 그 질문은 못들은 걸로, 안 들은걸로 칩시다. 




싸우지 않고, 엄마 부르지 않고 3시간 잘 놀면 30분은 게임을 시켜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래놓지 않으면 둘이 5분 간격으로 엄마를 불러대서 도통 제가 뭘 할 수가 없거든요. 애들이 엄마를 찾지 않으면 빈둥지 증후군에 걸린다고 하는데 과연 저도 그럴까요. 지금 마음으론 절대 안 그럴거 같은데 말입니다. 

싸우는거 아니면 뭘 해도 괜찮다고 하니 장농이 남아나질 않습니다. 뭐를 하고 놀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간간히 웃음소리 들렸으니 그걸로 됐습니다. 


아이들에게 완벽한  청소를 시키기는 어렵습니다. 실제로 청소는 고도의 정신작용이래요. 일의 순서와 배치를 추상적으로 구상해야 되서 그렇다고 합니다. 하지만 청소 말고 정리, 그 중에서도 제자리에 물건을 갖다 놓는 것은 돌쟁이 아가도 할 수 있는 일이지요. 저도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청소는 사용이 끝난 물건을 제자리에 갖다 놓는 단순한 일입니다. 10살이 된 지금보다 아장아장 걷는 십 몇 개월 때 더 잘했던거 같은 느낌은 제발 그냥 느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텔레비전 보면서 마셨던 물컵, 젤리 껍데기, 신던 양말 등등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 최대한 건조하게 '이거 갖다 놔라' 라고 말합니다. 말하면서 늘 생각합니다. 대체 몇 번 말해야 끝나는 일일까요. 이렇게 말하는게 끝날 날이 과연 오긴 올까요. 우리집만 이럴까요. 다른 집 애들은 바로바로 치울까요.  남의 집 아이들이 어느 학원 다니는지는 안 궁금한데 이건 정말 궁금합니다. 

붙박이 장에 본인들의 집을 만들었다 합니다. 어딜봐서 집인지는 저도 모르겠으나 안 싸우고 놀았으니 그걸로 됐습니다.


도무지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아이들의 물건들 앞에서 여리고성을 돌던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합니다. 구약성서 여호수아에서 신이 여호수아에게 말했어요. 


"내가 여리고성과 그 왕과 모든 군인들을 이미 네 손에 넘겨 주었다. 너와 너의 모든 군대는 여리고성 주위를 6일동안 매일 한 바퀴 씩 돌아라. 제사장 7명이 각자 수양의 뿔로...(어떤 방법으로 돌지 설명합니다)...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너희가 그 성을 일곱 바퀴 돌아야 한다. 제사장들이 나팔을 한 번 길게 불면 모든 백성이 큰 소리로 외치게 하라. 그러면 그 성벽이 무너질 것이다"


여호수아와 그의 백성들은 7일차에 성이 함락될 거란 말을 믿고 여리고 성을 하루에 한 바퀴 씩 돕니다. 하지만 6일차까지 여리고성은 굳건합니다. 돌멩이 하나 떨어지지 않았어요. 7일 째 되는 날에 전과 같은 방법으로 성을 일곱 바퀴 돌았고 제사장의 나팔 소리를 듣고 일제히 큰 소리로 외치니 갑자기 성벽이 무너집니다. 


정말 여리고 성이 6일동안 돌고 7일차에 소리 질렀다고 무너졌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어요. 제가 본 건 어찌됐든 6일차까지 아무 변화가 없다는 지점입니다. 


'너네가 먹은 물컵은 싱크대에 갖다놔라' 를 몇 년 째 말하고 있는 제게 여리고성의 6일은 위로였습니다. 


매일 말해도 한치의 변화도 없는 아이들을 보며 내가 뭘 잘못 가르치고 있나, 아님 소용없는 일에 내 진을 빼고 있나, 그냥 내가 움직여서 치워야 하나 생각을 한 적도 있거든요. 그런데 7일차에 무너진 여리고 성은 


매일 조금씩 변화하지 않아도 꾸준히 하면 어느날 갑자기 될 수도 있구나 

라는 희망을 줍니다. 조금 바꿔서 보면 물컵이나 양말이 제자리에 가는게 조금씩 발전하긴 어려운 일이에요. 양말 몇 백 켤레가 하나씩 세탁기로 가는 것도 아니고 하루에 고작 한 짝 인데 그게 매일 발전하긴 어렵잖아요. 내가 벗은 양말은 내가 갖다놔야 한다...가 어느날 인이 박히고 행동까지 인이 박히면 한 번에 이뤄질 일입니다. 여리고성이 한 번에 무너지지 않고 매일 조금씩 무너졌다면 성 안의 사람들도 뭔가 조치를 취했겠지요. 그러면 성이 그렇게 무너지지 않았을테고요. 일에 따라서 조금씩 발전할 수도,  아님 수면 밑에서 보이지 않게 준비하다가 한번에 확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양말 한 짝, 물 컵 하나에 너무 비장해보이나요. 사소하지만 내 주변을 내가 정리할 수 있는 '어른력'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생각보다 이거 못하는 어른 너무 많잖아요. 


이런 잔소리를 한 지 3년차인데 여리고성이 6일동안 변화 없었으니 저도 6년을 채워야 제 말 없이 양말과 컵이 제자리를 찾을까요. 아예 그렇게 마음을 놓아버리니 차라리 편합니다. 그렇게 오늘도 저의 여리고 성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방학이라 하루에 두 세 바퀴는 더 돌아야 하는군요.   

이 젤리껍질 누구야~ 했더니 아빠가 이래놓고 갔다고 합니다. 남편도 여리고성에 포함되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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