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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Dec 30. 2019

버틸 것인가. 유인할 것인가

방학을 보내면서 돌아보는 여리고성과 아이성

감정 없이 ‘네가 쓴 컵을 설거지통에 갖다 놔라’ 라고 하는 게 얼마나 쉽고 간단한 일이었는지, 이제야 반성하는 중입니다(참고 : 당신의 여리고성이 있나요).



 아이와 24시간 붙어있으면서(네, 지금은 방학입니다. 엄마의 개학이라고 하지요) 이렇게 간단한 일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게임 시간이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질 때, 방학 숙제를 해야 할 때, 둘이 죽자고 싸울 때, 곧 있으면 식사 시간인데 간식 타령만 할 때 등등은 ‘~해라’의 한 마디로 끝나지 않아요. 설득이나 회유, 은근히 꼬시기, 물론 하다하다 안되면 엄마의 괴성으로 끝난 적도 있습니다만.

    

아이는 주2회 글쓰기 숙제가 있어요. 무슨 요일에 할지 스스로 정했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하느라 시작조차 안하고 있습니다.  


“(아주 천연덕스럽게)글쓰기 숙제는 무슨 요일에 한다고 했더라?”

“아, 오늘이네. 이따가 할게”

“이따가 언제쯤인지, 시간으로 콕 찝어서 말해주면 안될까?”

(이때도 밝고 맑은 목소리로, 정말 궁금한 듯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마음의 소리는 물론 ‘지금까지 게임 했으면 당장 끄고 시작하란 말이다!!!!’ 인거 아시죠. 저만 그런거 아니죠.)

“음... 2시에 할게”    


2시는 당연히 지났고, 두 시 반이 되었습니다. 아이는 동생과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지요. 저는 아이의 글쓰기 공책으로 얼굴을 가린 채 아이 옆에 가서 말합니다. 목소리 변조는 필수입니다.     


“흑흑, 주인님이 나를 잊었나봐. 나는 이제 버림받은 공책이야”

“엥? 엄마 뭐해?”

“내가 아직도 엄마로 보이니, 나는 공책이야. 난 주인님이랑 2시에 데이트 하기로 했는데 바람맞았어. 이제 내가 갈 곳은 없어. 엉엉”

“히히, 알았어. 내가 널 받아줄게”    


역할극에 금방 들어오는 걸 보면 아직 애는 애인 것 같습니다. 다행히 오늘 숙제는 수월하게 끝납니다.     




신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리고성처럼 아이성도 너희 손에 붙이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런데 여리고성에 비해 뭔가 복잡합니다. 한 번 볼까요.     


여호수아는 일찍 일어나 병력을 점검하고 이곳저곳에 병력을 배치했다. 그리고 그날 밤을 계곡에서 보냈다. 아이왕이 이것을 보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병력을 이끌고 이스라엘군과 싸우기 위해 요단 계곡을 향해 달려 나왔다. 물론 그들은 이스라엘 병력이 성 뒤에 매복하고 있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대는 패한 척 하면서 광야 길로 도망쳤다. 이때 성안의 모든 아이군이 이스라엘군의 유인작전에 말려들어 그들을 추격하느라고 성에서 멀리 떠났고 그때 매복했던 이스라엘군이 일제히 성안으로 돌격했다. 아이군이 뒤돌아보니 성은 불타고 있었고 도망가던 이스라엘군이 돌이켜 반격 태세로 나오자 아이군은 도망칠 길이 막연하였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여리고성에 이어 아이성 까지 함락합니다. 그런데 함락하는 방법이 다르지요. 여리고성은 그저 한 바퀴씩 6일 동안 돌고 7일차에 좀 더 많이 돌고 소리 지르면 되는데 아이성은 전날부터 가서 잠복해야 하고 유인하느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도망가야 합니다. 성을 함락하는 건 같지만 품이 많이 드는 방법입니다.     


그저 버티면 되던 여리고성에 비해 뭔가 전략을 짜야 하는 아이성은 숙제 하나 시키겠다고 역할극을 했던 저를 위로합니다.


육아는 케바케(case by case)라고 하지요. 아이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그걸 알면서도 왜 이렇게까지 맞춰야 하는지 드럽고 치사한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유인 작전 따위 없이 ‘시간 됐으니 빨리 해’라고 소리 지를 수 있지만 우아한 엄마를 유지하고 싶습니다. 성 하나 함락하는 것도 접근 방법이 다른데 하물며 사람 하나 키워내는데 그 정도 고민도 안한다면 너무 성의 없잖아요.


여리고성처럼 묵묵히 버텨야 하는 일인지, 아이성처럼 전략을 짜야 하는 일인지 판단하는 지혜가 양육자에게 필요해요. 그래서 아이 키우는 일은 나를 키우는 일이기도 하네요. 그러니 나나잘해야겠어요.


방학이 조금만 더 짧으면 더 잘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방학 1주일차이기 때문일 겁니다.


이렇게 머리 맞대고 놀면 이걸 끊고 숙제하라고 하긴 좀 그렇죠. 이거 끝날때까지 기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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