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율 세계 꼴찌에 주민등록상 인구가 줄어드는 판이라는데 육아서는 끊임없이 쏟아진다. 그중 상위권은 ‘책 육아’다. 책을 많이 읽은 아이는 그렇지 않은 아이보다 잘 큰다, 란 내용이다.
‘잘 큰다’의 정의는 많겠으나 판매량으로 압도하는 정의는 ‘(좋은 인성을 가진) 높은 학업성적’이다.
학령기 아이를 둔 엄마 귀가 코끼리 귀보다 더 커진다.
코로나로 학교에 안 가는 날이 더 많아지면서 책 육아의 마지막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이 기회에 독서를 늘려서 학업에서도 우월하게 치고 나가게 만들겠어! 나 홀로 그리는 청사진에 잠깐 취했다.
어느 날, 영어 동영상을 보던 큰 아이가 말한다.
“엄마, 이거 내용이 좀 틀려. 중성자는 그게 아니잖아”
“응? 중성자?”
“어... 중성자는 이러저러한데(난 들어도 모르겠다) 이 영상에서는 반대로 말하잖아.”
“엄만 잘 몰라. 넌 어떻게 알아?”
“엄마가 사준 백과사전에서 봤지.”
드디어 결실이 맺히는 것인가. 내장을 울릴 파워 칭찬을 끌어다 퍼부었다.
다음날, 학교 온라인 수업 숙제 결과지를 봤다. 단순 나눗셈 문제다. 얼핏 봐도 반 이상을 틀렸다. 내 앞에서 다시 풀어보라고 했다.
나눗셈은 1학기 때 배운 거라 까먹었다고 아이가 당당히 말한다. 응? 두 자릿수 사칙연산을 까먹은 게 그렇게 당당할 일이 아니거든 얘야?
마음의 소리를 일단 눌렀다. 건조하게 말했다.
“이건 까먹고 말고 할 게 아냐.
한글 읽듯 그냥 해야 되는 거야.”
워크지를 출력해서 주고 나왔다. 그래. 잠깐이겠지. 수학 올림피아드 문제를 풀라는 것도 아니고 미적분을 하라는 것도 아닌데 설마 이걸 못하겠어?
이걸 하라는 소리가 아니라고!
설마는 사람을 진짜 잡기도 한다. 아이는 못한다고, 안 한다고 뒤로 누웠다. 왜 아이를 키우는 일은 수시로 나의 밑바닥을 확인하게 하는가. 어제 칭찬으로 울린 내장 파워가 제곱 날개를 달아 아이를 몰아쳤다.
“어젠 중성자를 설명하던 애가
단순 나눗셈을 못한다는 게 말이 돼?
이건 모르는 게 아니라
성의가 없는 거야.
뚝 그쳐!
뭘 잘 했다고 울어대!
그치고 30분 안으로
이거 다 해놔!”
‘책 육아 따위, 책 육아로 되는 과목이 있고 안 되는 과목이 있다고 왜 안 써놨어!’
아이 방을 나오고서도 넘치는 화를 쏟아낼 곳이 없어서 괜히 책을 욕하는 중이었다. 동시에 택배 초인종이 울린다. 뭐지.
뜯어보니 김소영 작가의 <어린이라는 세계>다. 어린이에게 이 난리를 피우자마자 배송되는 타이밍이라니. 갑자기 입이 쓰다. 뒷 표지에 윤가은 영화감독이 쓴 추천사가 있다.
‘.... 이미 작은 감각들이
무뎌지고 퇴화한 어른으로서
어린이의 세계에
다시 진입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과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노력과 정성으로 어린이의 세계에 진입하기는커녕 5분 전의 나는 스콜처럼 아이에게 들이쳤다. 예고 없이, 내 멋대로, 와장창.
아이의 방문을 슬그머니 열어봤다. 표정 없는 얼굴로 멍하니 의자에 앉아있다. 가능한 최대의 다정함을 장착하고 조심히 물었다.
“딸, 핫케이크 구워줄까?”
“어? 어제 다 먹은 거 아냐?”
“반죽 남겨놨어”
“좋아. 딸기랑 같이 먹을래”
표정이 조금씩 돌아온다. 프라이팬을 예열하면서 아까 그 뒷 표지를 다시 봤다. 김지은 어린이 문학 평론가의 추천사다.
‘... 다그치는 어른을
힘껏 이해하고
기다려 주는 어린이는
더없이 다정한 사람들이다’
어린이 말고 청소년이었다면 5분 만에 태도 돌변한 나를 비웃으며 “됐거든” 하며 방문을 쾅 닫아버렸겠지. 그러지 않고 나의 어설픈 다정함을 받아준 아이가 고마웠다. 나는 전열을 가다듬어야 겨우 나올까 말까 한 다정함이 어린이에게는 기본값이다.
책 육아는 잘못이 없다. 책에 되지도 않을 내 청사진을 갖다 붙인 내가 잘못이었다. 이렇게 쓰다 보니 1년 전쯤에도 이 비슷한 반성을 했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누굴 탓하랴.
우리 집 어린이는 어린이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책을 읽으며 마음이 급해졌다. 내가 그 시간을 더 망치기 전에 좀 더 살며시 들여다봐야겠다. 스콜 말고 가랑비처럼 천천히.
그러지 않으면 다음 1년 후엔 정말 “됐거든” 직격탄을 맞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