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와 손녀, 누가 더 중한가(2)

내가 맞는 거 같았지만 말은 못 했다.

by 음감
“으악, 할머니 이 사진 좀 봐.
난 맞는 한복을 입은 적이 별로 없어.
일 년에 한두 번 입는다고
왕창 큰 거 사서 접어 입었거든.
이건 소매도 짧네.
몇 번 안 입는데
그 사이에 맞는 치수를 지나버리면
한 번도 제 사이즈로
못 입는 거지.
나를 촌스럽게 만든 건
엄마가 주범이야!”

무릎 위에 앨범을 놓고 보던 할머니는 갑자기 탁 소리를 내며 앨범을 내려놨다. 뒤 이어지는 낮은 목소리.


“그래도 느이 엄마가
그리 악착을 떨고 아껴 살았으니까
니가 이젠 이사 안 가고
아파트에서 사는 거 아녀!
엄마한테
그렇게 말하는 거 아녀!”


중학교 올라오면서 아파트로 이사 왔다. 대전 비래리 12평 빌라에서 태어나 15년 동안 10번의 이사를 다녔다지. 할머니가 고작 어린애 한복을 집 사는 일까지 확대시키는 건 아무리 봐도 무리수 같았다.


“어휴, 그깟 한복 사이즈 좀 맞춘다고 아파트 못 오면 세상에 아파트 살 사람 아무도 없겠네”


뒤 이어지는 짧고 경쾌한 울림 “짝!!”


할머니의 손바닥이 엎드려서 앨범을 넘기는 내 등짝을 후려쳤다.


“악! 할머니 왜 때려!!”


“너 느이 엄마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할미가 방금 말했지.
느이 엄마 아녔음
넌 지금도
비래리 12평 빌라에서 살 거라고!
그 집이 얼마나 추웠는지 알아?
이집은 새 아파트라 따뜻하고 시원하고
을마나 좋냐.
이 누무 지지배는 배가 불러서!!”


“쳇. 비래리 빌라는 생각도 안 난다 뭐.”


들릴 듯 말 듯 구시렁대다가 갑자기 생각났다.


“아 맞다 할머니. 난 11월생이잖아. 그런데 엄마가 우겨서 상반기 생일자 명단에 나를 넣었더라고. 유치원은 5월까지 다니고 중퇴했는데 생일파티를 했다니까? 내가 조금만 더 컸으면 엄마를 말렸을 거야. 창피하게 그게 뭐야. 안 하면 안 했지! 이래서 아줌마들이 놀림감이 된다고”


여전히 엎드려서 발가락만 까닥거리며 말했다. 할머니의 대답이 없다. 대신 뭔가 등줄기가 서늘한 기분. 고개를 들어보니 할머니가 나를 노려보고 있다.


“어... 할...머니... 왜... 내가 뭐....”

“이누무 가시나가 할미 말을 뭘로 듣고!!”


할머니는 어지간해서 화를 내지 않았다. 길석님이 내게 화가 났을 때도 할머니는 나의 피난처였다. 할머니는 늘 내 편이었으니까.


할머니가 나를 ‘이누무 가시나’라고 하는 건 일 년에 한두 번? 가시나가 일단 뜨면 공습경보다. 피하기엔 늦다.


“내가 아까부터 말하지.
느이 엄마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라고.
회사 다니면서
큰 딸 생일파티 한번 시켜주겠다고
그 부산을 떤 애미한테
뭐가 어쩌고 어째?
너는 좀 맞아야 돼!”


아까의 철썩이 아직 가라앉지도 않은 내 등에 할머니의 2연타 철썩이 내리 꽂혔다. 나는 한 바퀴 굴러 방문 쪽으로 피했다.


“아이고!! 알았어. 잘못했어.
엄마한테 아줌마라고 안 해.
창피하다고 안 하면 되잖아!”

“이누무 가시내.
너 이리 안 와!
넌 더 맞아야 돼.
왜 좋게 말할 때 안 듣고
기어이 화를 불러!!”


11월에 태어난 애를 3,4,5월 생일자 사이에 끼워서 생일 파티를 하고 유치원을 관둬버린 건 분명 엄마가 잘못한 거 아닌가...싶지만 감히 입밖으로 낼 용기는 없었다.


할머니가 잘금잘금 자주 화냈으면 중학생의 정의감으로 발끈 했겠다. ‘어쩌다 한 번 화내는 사람’의 에너지는 발끈이고 뭐고 그냥 납작 엎드리게 만들었다.


분명 할머니의 사랑은 나였다. 그러면서 어느 한쪽엔 신성불가침처럼 여겨지는 부분이 있었다.


할머니의 며느리 사랑. 할머니는 돌아가신 지 10년이 넘고 길석님은 옛날 일을 들추기엔 허약한 기억력이다. 나만 뿌연 기억 속에서 오종종 거리며 사랑일지도 모르는 순간을 들쑤신다. 아니, 사랑보다 한 차원 높을지도.



어디서도 답을 들을 수 없을 그들의 이야기를 생각하다 보면 결국 지금 내가 해야 할 일로 돌아오고야 만다. 아이를 키우는 건 아이를 보고 닦달하는 게 아니라 아이를 둘러싼 환경을 먼저 안정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그 원론적인 얘기 말이다.


할머니나 길석님이 서로 뒷담화를 했으면 나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나를 지탱하는 두 기둥이 흔들리는 걸 실시간으로 보는 건 일종의 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안 보이는 데서도 서로를 위하는 그 마음이(설사 내 등에서는 불이 났을지언정) 내게 안정감을 준 게 아닐까.


가르치지 않았으면서 누구보다 많이 가르쳤던 할머니와 길석님, 그들의 가르침을 30년이 넘은 지금에서야 조금씩 깨우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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