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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Jan 06. 2020

엘사 언니, 나한테 왜 그래요.

겨울왕국이 가르쳐준 겸손함

겨울왕국의 엘사가 전국의 영유아를 강타한 2013년.  놀이터에 나가면 다들 손에 잡힌 뭔가를 뿌리며 레디꼬~ 를 외치는 때였습니다. 이제 4년이 지나 제 두 아이들은 초등 언니와 예비 초등이 되었고 이번에는 인 투 디 언논~ 을 하루 종일 부릅니다. 방학 맞네요. 무슨 후크송도 아니고 종일 맴도는 노래입니다. 


긴긴 방학 동안 쫌 생산적인, 그러니까 엄마 보기에 흐뭇한 책 읽기, 지난 학기 복습(선행은 바라지도 않는 거 아시죠. 모르신다면 내가 언제 수학경시 나가라고 하든? 참고)도 하고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런 일은 이번 방학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방학이 제 생애에 있긴 할까 싶습니다. 


렛 잇고에서 렛 잇고 말고는 다른 가사 없던 것처럼 이번 노래도 마찬가지네요. 렛 잇고야 4살 때였고 혀 짧은 한국말할 때니 귀엽다고 치지만(설사 안 귀엽다고 해도 신생아 둘째를 달고 있어서 정신없던 시절입니다) 누구는 영어 챕터북을(그림책도 아니고!!)줄줄 읽는다는데 우리집 예비 4학년님은 오로지 인 투디 언 논~ 만 목놓아 부르고 있으니 어미 입장에선 또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저는 조용히 컴퓨터를 켭니다. 


가사를 다운로드하고, 

최대한 원작의 뜻을 헤치지 않게 번역을 달고

(이러느라 나름 저도 고민했습니다. 그냥 긁어서 붙이지 않았습니다!) 

모를 법한 단어를 정리하(다가 너무 많아서 이건 포기하)고, 

그림도 몇 개 넣어서.


아이에게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상냥하게 말했죠.


"인 투디 언 논 만 하면 지겹지 않아? 앞뒤로 다른 부분도 좀 해 봐. 엄마가 정리했어"


아이는 쓱 보더니 표정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그러더니 하는 말,


"엄마, 핸드폰에 멜론 있지? 나 그걸로 연습 좀 해봐도 돼?"


나름 성의껏 만든 제 워크시트는 5초 만에 무시당하고 아이는 제 폰을 가지고 들어가더니 앞부분부터 얼추 부르긴 합니다. 부르는 건지 웅얼거림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다윗에게 전쟁터에 있는 형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라고 심부름을 시킵니다. 다윗은 진영으로 가서 형들에게 가서 안부를 물었어요. 다윗이 형들과 이야기하는 동안 적진인 블레셋 쪽에서 대장 장군이 나와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합니다. 어린 다윗이 그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자기도 싸우겠다고 나서네요. 다윗의 형들은 너의 할 일은 양치기 목동이라고, 전쟁놀이를 할 군번이 못된다고 꾸짖었어요. 그래도 당당한 다윗, 계속 싸우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사울 왕까지 알게 되었어요. 사울 왕이 다윗에게 너는 소년이라 싸울 수 없다고 하니 다윗이 이렇게 대답해요.


"저는 아버지의 양 떼를 지켜 왔습니다. 사자나 곰이 양 떼에 달려들어 한 마리라도 물어가면 저는 곧바로 뒤쫓아가서 그놈을 쳐 죽이고, 그 입에서 양을 꺼내어 살려내곤 하였습니다. 그 짐승이 저에게 덤벼들면 그 턱수염을 붙잡고 때려죽였습니다. 제가 이렇게 사자도 죽이고 곰도 죽였으니 저 블레셋 사람도 그 꼴로 만들어 놓겠습니다." 


이 패기가 사울 왕에게 전달된 것일까요. 사울은 다윗이 나가는 걸 허락합니다. 그러면서 왕의 군장비로 다윗을 무장시켜 주었어요. 머리에는 놋 투구를 씌워주고 몸에는 갑옷을 입혀주었지요.  허리에는 사울의 칼까지 찹니다. 몇 발자국 걸어본 다윗이 다시 말하네요. 


"이런 무장에는 제가 익숙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무장을 한 채로는 걸어갈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다 벗었습니다.  다윗은 목동의 지팡이를 들고, 시냇가에서 돌 다섯 개를 골라서, 자기가 메고 다니던 주머니에 집어넣었어요. 그리고 그 블레셋 사람에게 가까이 나아갑니다. 


이 이야기 속의 블레셋 장수는 골리앗입니다. 다윗과 골리앗. 많이 들어본 이름이지요? 이렇게 골리앗을 마주한 다윗은 그가 쓰던 돌멩이를 골리앗의 이마에 정통으로 맞췄고 골리앗은 쓰러집니다. 대장이 쓰러진 걸 보고 당황한 블레셋 군사들은 도망갔고요. 다윗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제가 열심히 만든 워크 시트지는 사울 왕의 군장비와 다름없었어요. 

나름 훌륭했(다고 믿었) 던 제 워크 시트지는 신세대 아이에겐 거추장스럽기만 했습니다. 다윗은 자기에게 가장 익숙한 돌멩이로 골리앗을 쓰러뜨렸어요. 핸드폰을 가지고 간 아이는 문자 그대로 방에 콕 박혀서 종일 노래만 부르더니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나옵니다. 


"엄마, 내가 인 투디 언논 부르는 거 들어봐"


꽤 진지한 얼굴을 하더니 무반주로 처음부터 시작합니다. 중간중간 엘사의 액션은 유튜브를 보고 했다고 합니다. 도치 엄마인지 꽤 그럴싸하게 보입니다. 중간에 막 빨리 지나가는, 그래서 당연히 발음 꼬일 거라고 예상했던 부분도 얼추 비슷하게 넘어갑니다. 신기하네요. 


사울은 다윗을 이해하지 못했고 저는 아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사울은 본인이 줄 수 있는 최선의 준비를 다윗에게 제공했고 저 역시 예쁜 워크 시트지를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어른 세대의 준비는 구약시대에도, 2020년에도 
그리 유용하지 못했어요. 


20세기의 부모가 21세기의 아이를 키운다는 말을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에서 봅니다.  


21세기의 감성을 따라가지 못하는 어미는 아이의 말을 조금 더 자세히 들어봐야겠습니다. 혹시 알아요? 잘 들어주면 내 앞의 골리앗을 얘가 쓰러뜨려줄지. (그런데 과연 지가 부르는 노래의 뜻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아, 확인하고 싶다.... 확인하고 싶다....)


출처 : https://images.app.goo.gl/Tx8vhtvQLgbYmvut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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