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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Mar 22. 2021

이렇게 또 망한 날

여덟 개 몰아보기

누구라고 해야 할지, 그것이라고 해야 할지. 넷플릭스 초기화면에서 본 슈트가 청천벽력 하게 멋있어서 사람 나고 슈트 났는지, 슈트 나고 사람 났는지 헷갈렸다. 헷갈림은 조건 반사마냥 슈트를 터치했고 tvN 드라마 <빈센조> 1화가 시작했다.

대기업 바벨은 바벨 타워(이 정도면 이름이 스포) 건설을 위해 빈센조(송중기)가 금을 숨긴 건물을 불법으로 매수했다. 빈센조는 분노한다. 분노했지만 차갑게 출동할 때 입은 슈트가 또 청천벽력 하게 멋져서 중간에 끊을 수가 없는 거라.

편당 1시간 20분인데 빨리감기 하며 8개를 다섯 시간만에 봤다. 끝나니 새벽 4시. 청천수트발 각성 최대치를 갱신한 뇌는 오후 4시인 양 또롱또롱하다. 이렇게 또 망한 날이다. 적당히 끊고 잤어야지 하는 후회가 든다.

빈센조가 그랬다. 후회는 살아서 겪는 지옥이라고. 생활이 후회인 저는 일상지옥 만랩인가요. 알리바바의 마윈이 그랬다지. 30대는 뭐든 배워 열심히 하고 40대는 새로운 거 배울 생각 하지 말고 해오던 걸 잘해야 한다고. 마흔에 배우긴 늦다고.

후회는 번뇌를 부른다. 뭘 새로 하자니 삽질 같고, 하던 육아와 살림을 '잘'의 경지까지 끌고 갈 마음은 없고. 사춘기 육아는 힘을 빼는 게 가장 큰 힘이라 하니 더 그렇다. 깨달음을 얻지 않는 한 답이 없는 번뇌인데 빈센조 건물에 세든 스님이 답을 준다.

"번뇌는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그 과정의 전리품일 뿐 깨달음이 목적은 아니지요."

나도 모르게 싸우고 있었다. 작게는 이겼던 것 같다. 번뇌에 침잠할 때 확 뛰어버리면 더 이상 가라앉지는 않았으니까. 크게 이긴 것 같진 않다. 주기적으로 침잠했고 이렇다 할 깨달음도 없으니까.

빈센조에게 당하던 바벨은 8화에서 빈센조를 이긴다. 빈센조가 은행장을 조종해 바벨 자금줄을 막으려 했는데 바벨 법무사 우상(이름 스포가 여기도 있다)이 마마보이 은행장 엄마를 조종해 빈센조 계획을 망쳤다. 빈센조는 졌는데도 우상에게 '학습이 되시나 봐요'라고 받아친다.

스님이 안 준 대답을 빈센조가 줬다. 번뇌와 하는 반복 싸움은 학습이 된다. 번뇌를 다루는 법을 학습해서 번뇌가 몰고 온 후회 지옥을 수시로 닫는 것. 학습이 후회를 없앨 수는 없지만 다룰 방법은 알려준다. 역시 승복보다 청천 슈트다.

청천 슈트에 빠져 시작한 드라마가 어느새 작은 답을 툭툭 던진다. 슈트에 취해 답처럼 느끼는 거 아니냐고 한다면 절대로 맞다. 그러면 또 어때. 내가 필요한 답을 내식으로 찾을 수 있다면 좋은 게 아니겠는가.

지난 주말에 빈센조 9화가 이미 끝났을거다. 주섬주섬 넷플과 이어폰을 챙긴다. 청천 슈트님이 오늘은 무슨 답을 줄까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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