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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Apr 15. 2021

윤종신이 소환한 오바마

7년

2016년 12월 월간 윤종신 제목은 <그래도 크리스마스>였다. 가사의 일부를 보자면

-  다 함께 외쳤던 그날들. 정말 젠틀했던 강렬했던

-  세월 속에서 내리는 하얀 눈. 진실만큼은 덮지 말아 줘

-  길을 걷다 누구라도 마주치면 같은 맘일걸

   뮤직비디오는 단순한 선으로 쓱쓱 그린 2D 일러스트였지만 한국에서 살았다면 누구나 기억할만한 사건들이었다. 뜨끈해진 눈가로 한참을 들여다보다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애들을 등원시키고 오바마 대통령 수락 연설을 열었다. 오바마 정치 이력과 상관없이 영어공부에 좋은 연설문이라 해서 랜선 스터디를 하는 중이었다.

I am my brother’s keeper.

나는 내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다.
I am my sister’s keeper.
나는 내 자매를 지키는 자입니다.
That makes this country work.
그것이 이 나라를 만듭니다.

   이 문장이 가인의 질문에 대한 답이라는 것도 스터디 초기에 듣긴 했다. 윤종신의 노래를 들은 다음날은 낯익지만 새로운 문장으로 다시 읽혔다.

    아벨이 살해당한 직후, 신은 가인에게 “네 동생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는다. 가인은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반문한다. 오바마는 가인의 질문에 성실히 대답한다. 내가 지키는 자라고. 그리고 지키는 자가 나라를 만든다고.

   나라의 의무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구나. 생각이 여기까지 오자 전날 2D로 본 뮤직비디오가 내 기억에서 4D로 재생됐다.

   윤종신이 ‘다 함께 외쳤던 그날들’을 부를 때 다 함께 외치기 위해 유모차를 끌고 광장에 나갔던 그날이 재생됐다. 이가 시리게 추웠던 날, 몇몇 어른들은 유모차 속 아이에게 핫팩을 나눠줬다. 핫팩으로 형제를, 자매를 지켰다.

   내 아이들보다 조금 큰 삼 남매를 키우는 지인은 아이들을 데리고 구의역에 갔다고 했다.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빼곡히 붙은 포스트잇과 꽃다발을 보며 아이들이 감당할 만큼의 언어로 이야기했다지. 아이와 이야기하는 지인을 상상하며 그렸던 포스트잇과 꽃들이 재생됐다. 윤종신 말대로 젠틀하고 강렬하지 않았을까.

   수학여행의 달뜬 공기로 가득 찼던 배가 가라앉을 때, 우리 집 둘째는 막 걸음마를 시작했다.  뒤뚱거리는 아이 뒤를 종일 따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시야가 뿌예졌다. 이렇게 키웠을 텐데, 뒤에서 지키고 있었을 텐데, 더 이상 지키지 못할 마음이 가늠 안되어 그저 코만 풀어댔던 그해 봄내음이 선명해졌다.

   윤종신이 ‘세월 속에서 내리는 하얀 눈’이라 노래할 때 마냥 신난 아이의 머리 위로 눈처럼 날리던 벚꽃잎을 봤다. 내리는 벚꽃에도, 쌓이는 눈에도, 그보다 더 쌓이는 세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을 지키는 사람들이 새삼 고마워졌다. 그들이야 말로 내 형제를, 자매를 지키는 자였다.

   아벨의 제사는 받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은 신의 의도가 이젠 궁금하지 않다. 이미 일어난 일에 갖다 붙이는 수많은 가정법은 아무 소용없으니까.

   대신 가인의 질문과 오바마의 대답을 오래 기억하려 한다. 혈육 너머의 나의 형제를, 자매를 지키는 자가 되려 한다. 윤종신 노래대로 ‘길을 걷다 마주친 누구라도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지키는 자가 되는 꿈같은 현실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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