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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May 16. 2021

반복이 만든 이것

말뚝을 박는 야엘

  성경의 잠언은 2천 년을 이어져 온 지혜서라 한다. 그런 잠언인데 31장은 구조가 잘못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선 여자들의 지난한 노동을 구구절절 기록했다. 그러더니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축복을 받는다.’로 끝난다. ‘고된 노동’과 ‘여호와를 경외함’과 ‘축복’은 어떻게 연결해야 지혜가 되는가.

  이 연결을 사사기의 야엘이라는 여인에게서 찾았다. 그의 일상을 추측해 보건데 잠언 31장의 여인처럼 하루가 바쁘지 않았을까 싶다. 사사기 5장 드보라의 노래에서 야엘에게 ‘천막에 사는 여인 중 가장 축복받은 자’라고 하지 않는가. 천막을 유지하는데 야엘의 공이 미비했다면 굳이 천막을 들먹일 필요도 없었을 거다. 천막에 사는 여인이라는 말속에 그의 노동이 그려진다.

   야엘의 집에 시스라 장군이 들이닥쳤다. 야엘이 놀라서 소란을 피웠다면 도망자였던 시스라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그를 해하려 했을지 모른다. 야엘은 소란 대신 우유를 내주고 이불을 덮어준다. 다른 사람을 보살피는 일은 여자들의 일상이었을 테니까. 예상 못한 변수의 등장에도 단단한 일상을 산다. 그의 일상은 도망자도 안정감을 느끼게 했는지 시스라는 “누가 와서 찾거든 아무도 없다고 말해주시오.”라고 말하고 깊이 잠든다. 야엘은 망치와 말뚝을 가져와 살며시 다가가서 말뚝을 그의 관자놀이에 대고 땅에 박아 죽였다. (사사기 4:21)

   시스라의 반격도 없다. 철기가 없던 시절이니 말뚝도 망치도 모두 나무일 텐데 한방에 끝냈나 보다. NIV 성경에 보면 말뚝은 tent peg(천막 지지대)라고 나온다. 땅에 말뚝을 박아 천막을 세우던 이에게 관자놀이 뚫기는 너무 쉬운 과제였을지도. 일상의 반복이 만든 기적이다. 말뚝박기는 시스라를 대비한 훈련이 아니고 그저 일상의 반복이었으니까.

  아니, 사람을 이리도 잔인하게 죽이는데 뭐가 기적이고 축복이냐고? 이 서사는 4장에서 이미 예언됐다. 여호와는 사사 드보라를 통해 시스라 장군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약속한다. 드보라는 바락 장군에게 출정 명령을 하지만 겁 많은 바락은 “당신이 나랑 안 가면 나도 안 갑니다” 라며 버텼고 드보라는 동행을 허락하면서 “여호와는 시스라를 한 여인의 손에 넘길 것이므로 당신은 승리의 영광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사사기 4:9) 야엘이 그 ‘한 여인’이다. 여기서 잠언 31장의 뜬금포가 이해됐다. 여호와는 일상을 팽개치고 신만 바라보는 사람을 축복하는 게 아니라 본인의 반복되는 일상을 단단히 일구는 사람을 축복하는구나.

   일상을 단단하게 유지하는 힘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삶의 문제에서 나를 지키는 방호벽이 된다. 나는 그것을 야엘을 통해 배운다. 야엘이 천막의 삶을 본인 일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하루가 지나도 또 똑같은 일을 해야 함을 지겹다고 거부했다면 시스라가 들어온 갑작스러운 순간에 이 정도의 순발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야엘이 결국 가야 할 방향은 이스라엘의 여호와라고 판단하는 지혜, 이 지혜 때문에 사사 드보라는 사사기 5장에서 야엘을 축복한다. 노동과 경외함과 지혜 사이의 얼개를 이렇게 확인한다.

   남들의 SNS는 정제된 순간만 보여주니까 부러워하지 말자 하면서도 ‘나는 왜 그 순간조차 없는가’로 빠져서 헤매는 날이 있다. 이제 그런 날이 올 때마다 야엘을 기억하려 한다. 그가 매일 세운 하루 속에서 가꾼 단단한 일상이 가져온 축복, 행여 내게 그런 극적인 축복이 없다 하더라도 반복이 주는 안정감과 그 속에서 키워질 나의 단단함을 소중히 가꿔보려 한다. 안정감과 단단함이야말로 소란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큰 축복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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