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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Jul 05. 2021

황리단길이 바꾼 두 가지

출애굽한 이스라엘

우리의 마지막 경주여행은 황리단길이 없던 시절이라 새로운 경주가 궁금했다. 문제는 숙소. 연휴 당일 아침에 결정한 경주행이라 예약 사이트에 남은 방이 없다. 안되면 차박하지 뭐, 일단 출발!


   설마 방이 없을까 싶은 마음으로 계속 검색하는데 진짜 없다. 한 시간이 지났는데 서울을 빠져나오지도 못했다. 점점 몰려오는 현실 자각.


   뭐하러 대책 없이 나왔을까. 집에 있었으면 멀미도 없고 이 기름값으로 맛있는 거 사다 먹고 잠도 편히 잘 텐데. 황리단길? 그냥 예스러운 건물에 카페나 소품 가게 같은 거 있겠지. 애들 취향에 맞지도 않을 텐데. 차박은 해본 적도 없고. 내가 미쳤나 봐. 그냥 집에 있을걸. 괜히 왜 나와서.


   코로나로 초등 아이들은 1년 내내 방학이었다. 1년 내내 혼자 누릴 시간 없이 애들 뒤치다꺼리가 쌓이니 집을 떠나 하는 뭔가가 간절했었다. 이 간절함을 교통체증 1시간 만에 완전히 잊은 거다. 가만, 이거 어디서 본 장면 같아.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로 살다가 모세를 통한 여호와의 계획대로 탈출한다. 광야생활이 길어지니 노예 해방의 기쁨은 잊고 모세에게 불평했다. 애굽에 있을 때는 힘들긴 했어도 쉴 집이 있었다고. 먹을 것이 있었다고. 광야는 아무것도 없지 않냐고. 아무래도 모세 당신에게 속은 것 같다고.   


   아니, 사람에게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데요. 좀 헤맨다고 불평합니까. 이래서 당신들이 고집 세고 어리석은 민족이라는 말을 듣는군요... 가 그전까지 출애굽기를 보는 내 시선이었다. 당연히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전제도 있었다. 없기는. 나온 지 1시간 만에 ‘뭐하러 나왔나’를 계속 돌아보는 나는 그들보다 한참 아래다. 이스라엘은 무려 40년을 광야에서 헤매지 않았는가. 폭동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세월이다.


   정체가 길어지니 아이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경주가 어딘데? 거기 가서 뭐해? 황 무슨 길? 길 보러 가? 얼마나 걸려? 경상도가 경주야? 등등. ‘나도 속 시끄러운데 뭘 자꾸 물어...’라고 하려다 조금 미안해졌다. 내가 집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애들에게 어디 간다는 말조차 안 했으니까. 아이들 옆으로 자리를 옮겨 함께 경주 검색을 했다.


   “우와, 엄마 여기서 연날리기해도 좋겠다. 황리단길 여기 예쁘긴 하네. 이 가게 스티커 사줄 거야? 파스타 집도 맛있겠다. 가게가 계속 기와집이야.”


   그 사이 메시지를 남긴 한 모텔에서 방이 있다는 연락이 왔다. 숙소가 해결되니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내 발등의 불을 끄니 광야의 엄마들이 생각났다.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면서 인구수가 줄지 않았다지. 그럼 그 와중에 출산과 양육을 했던 여자들이 있었을 터. 기록은 없지만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애 데리고 하는 차박도 심란한데 노숙이라니! 그뿐이랴, 유대인은 그들의 교육을 대대로 전승하는데 유명한 민족이 아닌가. 그 ‘대대로’에 광야 시즌도 있었을 터. 생존을 넘어 교육까지 했던 이름 없는 여자들의 노고에 머리를 숙였다. 하룻밤 차박으로 신경을 곤두세운 나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지다. 여기까지 가니 출애굽기의 주인공은 모세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자체가 됐다.


   일곱 시간 만에 경주 톨게이트를 통과했다. 때 이른 초봄의 따가운 햇빛도 힘이 빠져 서늘한 바람이 경주를 감쌌다. 처마 아래의 노란 간접 조명은 하루 동안 널뛰던 내 마음을 다독였다. 저녁을 기다리는 동안 아이들은 식당 앞 하얀 자갈이 깔린 작은 정원의 통나무 징검다리에서 폴짝거렸다.

저녁먹었던 식당

   그전까지 자주 읽은 출애굽기가 황리단길까지 오는 동안 다른 모습이 되었다. 내가 한 선택을 내가 불평하는 아메바 같은 짓을 이젠 그만 해야겠다고. 뭘 선택하든 아쉬움은 있을 거라고, 그러니 아쉬움에 집중하지 말고 얻은 것에 더 기뻐하자는 다짐을 했다. 황리단길은 그저 예스러운 건물과 카페가 줄지은 거리가 아니라 출애굽의 주인공도 바꾸고 나도 바꾸는 고마운 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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