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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Jul 21. 2021

사랑은 냉동실 제일 위칸에 있다

이건 엄마 꺼야.

나는 어떤 아이스크림이든 하나를 다 못 먹는다. 반만 먹어도 물린다. 아예 안먹기는 아쉬워서 남편한테 두 입만 나눠달라고 한다. 남편은 그냥 남기라고 하면서 말한다. "참 손이 많이 가..." 친엄마도 수시로 하는 이야기라 딱히 반박을 못했다.


어느 날 남편이 초코리치를 내밀었다.


"이건 당신이 하나 다 먹을 거 같아."


초코리치는 큰애의 최애 아이스크림이었다. 말리지 않으면 앉은자리에서 다섯 개도 먹어치울 수 있는. 그런 아이스크림을 나보고 먹으라고?

결혼 13년 차, 세월의 힘을 믿어보기로 하고 한입 먹어봤다. 오잉? 그 자리에서 다 먹었다. 남편의 자신감은 초코리치의 매끄러운 표면만큼 반들반들 윤이 났다.


"거봐. 내가 이거 한 입 먹어보고 당신도 먹을 줄 알았대도."


며칠 후, 남편이 퇴근길에 초코리치 몇 개를 더 사 왔다. 좋다고 폴짝 뛰는 아이에게 남편이 말했다. "이거 엄마도 좋아해. 같이 먹어."


아이는 알았다고 했지만 늘 그랬듯 좋아하는 마음은 들은 말을 지워버렸다. 아이는 세상을 얻은 얼굴로 야금야금 다 먹었다. '그거 엄마껀데?' 라며 아이의 평화를 깨지 못했다. 나가서 내 거를 사 오기에는 바깥의 햇빛이 먼저 말한다. "이 땡볕에 그거 먹겠다고 나온다고? 니가?" 음, 그 말이 맞아. 안 먹고 말지...


또 며칠 후, 늦게 퇴근한 남편이 냉동실에 아이스크림을 종류별로 넣으며 말했다.


"여기 있는 초코리치는 엄마꺼니까 건드리지 마. 니 꺼는 여기 있어."


사랑은 앞모습으로 다가와서 뒷모습으로 멀어진다고 하던데 그건 연인들의 이야기다. 부부는 뒷모습에서 가까워지기도 한다. 남편이 저런 대사를 할 때 나는 한참 아이들 저녁식사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싱크대에 서서 남편을 등지고 있었지만 나의 뒤통수는 남편에게 하트를 날리고 있었다. 등 뒤로 들리는 부녀의 대화를 반주삼아 달그락 거리는 그릇들은 순식간에 사랑의 노래를 불렀다.


남편이 출근한 날, 커피를 내리고 식탁에 앉았는데 문득 초코리치 생각이 났다. 냉동실을 열어보니 수납칸 제일 위에 초코리치 두 개가 반듯하게 놓여있었다. 초코리치를 만난 커피는 잠깐동안 나를 여행지의 어느 카페에 데려다 놓았다.


결혼 13년 차에 연애 13일 차 같은 사랑이 가능할까. 잠들기 전 휴대폰 너머의 그를 상상하고 일상의 피곤을 밀어내며 사랑을 확인하는 일, 세상이 핑크빛이고 나는 그 중심에 있다고 믿는 일들 말이다.


이제는 안다. 세상을 핑크빛으로 보는 건 누구랑 사랑을 확인하면서 할 일이 아니고 나의 시선을 먼저 바꾸는 일임을, 세상의 중심까지 될 필요도 없고 내가 내 중심이면 된다는 것을.  


그리고 남편이라는 세계에서 사랑은 말도, 눈빛도, 행동도 아닌 냉장고 수납칸 제일 위칸에서도 올 수 있음을. 이 사랑은 13일 차 연인은 절대 알 수 없을 것임을.




내일은 캐리브래드슈 님이 바톤을 이어받습니다. 작가 4인이 쓰는 <남편이라는 세계>에 관심이 간다면 지금 바로 매거진을 구독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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