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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Sep 02. 2021

에어컨을 켜기 위해 이것을 끊었다

안하면서 하는 환경운동

여자들의 매거진 '지구와 우리사이'에 실린 글입니다


역대급 더위라고 했다. 작년에도 역대급이라고 하지 않았나. 해마다 역대급이라 '역대'라는 단어가 초라해진다. 미국 해양대기국(NOAA)이 전 세계 올 7월 평균 기온이 20세기의 7월 평균 15.8도보다 0.93도 높았다고 발표했다. 역사상 가장 더웠던 2016, 2019, 2020년 7월을 0.01도 상회, 관측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중앙일보. 2021.8.18)


거실과 방에 시스템 에어컨을 설치했다. 시스템은 딱딱한 말이지만 시스템 에어컨 앞의 시스템은 더없이 부드럽다. 그의 자비에 치솟던 화가 가라앉고 내가 순해진다. 어쩐지 집도 더 정리된 것처럼 보인다.


설치는 했으나 내 아이들의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나라도 에어컨을 좀 꺼야하나 싶었다. 에어컨을 끄고 아이 둘과 종일 복작거렸다. 계속 이렇게 있으면 더 나은 세상이고 뭐고 나랑 애들이랑 싸우다 결단이 나버릴 판. 치솟은 불쾌지수는 모든 순간을 전투 3초전으로 세팅했다. 그깟 온도에 매우 휘청이는 사람이 나였다.


둘 다 포기할 수 없기에 어렴풋이 생각나는 책장을 뒤졌다. '나의 비거니즘 만화'. 이 책에 따르면 채식을 하면 잡식보다 이산화탄소 배출은 1/2로 감소, 화석 연료 사용량은 1/11로 감소, 물 사용량은 1/13로 감소, 토지 사용은 1/18로 감소한다고 했다. 수치로 하면 채식이 '매일' 환경에 줄 수 있는 도움은 이산화탄소 4.5kg 감소, 곡식은 20kg 감소, 물은 4,164L 감소였다.


때마침 신문(위와 동일)에서도 근거를 찾았다. 2018년 기준 전 세계에서 배출된 온실가스 371억톤 중 동물성 식품이 22%를 차지한다고, 그중 소 농장에서 나오는 메탄가스가 최고 77%로 주요원인이라고. 만일 지구인 모두가 일주일에 하루만 채식을 해도 아마존이 몇 프로 살아날거라지. 그렇다면 일년에 고작 보름정도 트는 에어컨은 비교대상도 안 된다는 계산이 나왔다.


에어컨을 틀었다. 에어컨의 바람이 한바퀴 돌자 화난 것 같은 집도 평온해진다. 아이들의 투닥거림도 그럴 수 있지, 애들이잖아...로 들리는 건 에어컨만 부릴 수 있는 마법이다.


요조 작가가 비건에 대한 아주 괜찮은 정의를 내렸다. 커스터마이징 비건, 때와 장소에 따라 비건과 논비건을 넘나든다. 완벽한 비건을 못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말고 내가 편하게 선택할 수 있는 순간에는 비건을 하라고.


요조 작가도 한 달에 한 번 부모님을 만날 때는 고기를 맛있게 먹고 온단다. 혼자서는 다시 비건이 된다고 했다. 에어컨을 포기할 수도, 가족의 식탁도 포기할 수도 없는 내게 딱 맞는 지침서다. 내가 비건하겠다고 가족까지 설득할 의무는 없으니, 그들이 나의 비건을 따를 의무 또한 없으니 말이다.


보름, 어쩌면 한달까지 길어질 수 있는 에어컨 죄책감을 그렇게 덜었다. 에어컨 바람 밑에서 순한 엄마가 되어야겠다. 순한 엄마가 넌지시 이야기하는 공장식 축산 이야기가 언젠가는 아이들의 마음에도 닿겠지.


 다음 여름에는 역대급이라는 말이 더이상 나오지 않기를. 작년이 역대급이었지, 재작년이 역대급이었지...라고 회자되는, 역대급은 정말 역대급으로 남아 전설이 되기를 바란다. 환경을 살리는 일은 나의 입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이 쌩뚱맞아보이는 연결에 더 많은 사람들이 도전하는 세상을 그린다. 이러저러한 사정들로 완벽하게 이루기 어렵겠지만 이룰 수 없는 것을 극복해나가는 삶도 괜찮은 삶일테니 말이다.


오늘도 에어컨은 아침부터 잘 돌았고 아이들과 나는 고기 없는 쌈채소로 아침부터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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