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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Aug 23. 2021

'그깟' 패킹으로 '새삼' 사람을 보다

세 시간 동안 주차만 다섯 번

"밥이 딱딱해"


압력밥솥 패킹 문제다. 헐거워졌다. 패킹 사러 임아트에 간다고 했다. 백신휴가로 누워있던 남편이 운전을 해주겠단다.


패킹 사이즈를 안 보고 왔다. 나의 덤벙거림은 어찌 이리 한결같은지. 쌓여있는 패킹들 앞에서 수학문제 풀 듯 머리를 쥐어짠다.


'이거겠지? 아닌가? 저건가? 처음 찍은 게 맞아!'의 공식에 따라 골라왔다. 잊고 있었다. 수학은 어떤 식으로든 내게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패킹 두께가 안 맞다. 남편이 주섬주섬 차키를 챙긴다. 내가 나섰다.


"쉬고 있어. 나 혼자 갔다올게"

"내 폰에 영수증, 카드 다 있어"

"어."


쓰던 패킹을 들고 갔다. 박스 그림에 기존 패킹을 대보니 잘 맞는 것 같다. 집에 와서 끼우니 너무 크다. 뭐지. 나 또 덤벙댄건가? 쓰던거 가져가도?


"쉬고 있어. 나 혼자 갔다올게"

"내 폰에 영수증, 카드 다 있대도."

"어... 이거 데자뷔 아니지?"


남편과 나는 빵 터졌다. 세 시간 동안 주차만 다섯 번째라고 킥킥댔다. 올 때마다 에어컨 바람이 춥다면서 옷은 안 챙기고 남편 팔에만 매달린다고 킥킥댔다. 시식대 직원이랑 눈인사한 거 같다고 킥킥댔고 닭강정이 만 2천 원인데 닭발이 9천 원이라고 킥킥댔다. 어이없는 반복이 웃겨서 킥킥대다가 그냥 보이는 게 다 웃겨졌다.


세 번째 임아트행에서 딱 맞는 패킹을 찾은 후 남편은 깊은 잠에 빠졌다. 그의 백신휴가가 이제 시작이다. 커피를 내려 식탁에 앉았다. 숨소리보다 크고 코골이보다 작은 남편의 수면음이 안방에서 식탁까지 넘어왔다. 압력밥솥의 칙칙노래에 은은한 밥 냄새가 넘실댄다. 밥과 커피 향기가 섞인 식탁 의자에서 나의 덤벙거림이 가져온 세 시간을 바라본다.


"사이즈도 안 보고 오는 사람이 어딨냐"

"내가 가달라고 했어? 본인이 따라와 놓고"

"좀 챙기며 살면 안 되냐?"

"자기는 뭐, 다 잘 챙기는 것처럼 말하네!!"


이렇게도 갈 수 있는 세 시간이 킥킥거림으로 얼레벌레 넘어갔다. 세월의 힘인가, 체념의 힘인가. 분명한 건 '그깟' 패킹으로 '새삼' 사람을 봤다는 것.


밥솥 패킹은 살림 전체에서 아주 작은 부분이다. 그 작은 아이가 오늘은 큰 일을 한다. 그의 온유함을 바라보게 하는 것, 살림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지만 온유도 그 못지않다는 것을 헐거워진 패킹이 말하고 있었다.


아마 한동안 패킹을 볼 때마다 생각나겠지. 시간이 지나 내 기억도, 패킹도 헐거워지면 다시 밥이 딱딱해지면서 오늘이 환기될지도 모르겠다.


감사는 금방 잊는다. 반복되는 삶의 조각이 그걸 다시 가져다 준다. 삶을 누리는 진짜 부자는  조각을 알아보고 많이 챙길 줄 아는 사람이 아닐까.


태권도 갔던 아이들이 발개진 얼굴로 송아지처럼 '움머아~~'하며 들어오는 저녁, 나는 커피잔을 헹구고 국을 올리면서 대답한다.


"옹냐 우리 강아지들~ 씻고 나와서 아빠 깨워~"


오렌지색 슬러쉬 하늘 한쪽이 진보라색 슬러쉬로 물들고 조용했던 식탁이 다시 복작복작해진다. 오늘 챙겨야 할 두번째 조각은 이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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