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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Oct 18. 2021

오전 수업으로 날아가버린 이것

어느 날의 요트

세월이 흘러 영희는 문화센터 강사는 관두고 일반 초중학교 강사가 됐어요. 학교에는 많은 선생님들이 있는 거 아시죠. 책상이 없는 선생님, 책상은 있으나 그 책상이 내년에도 내 책상 일지 확신할 수 없는 선생님, 스스로 관두지 않는 한 정년까지 내 책상이 있는 선생님 등이 있어요. 영희는 책상 없는 선생님이었어요.


책상 없는 선생님들은 대부분 한 학기에 몇 개의 학교를 주 1회, 혹은 격주로 나가요. 영희는 격주 1회, 한 중학교의 밴드 동아리 지도를 맡았지요. 금요일 오후 수업이었어요. 그 학교는 영희를 2년 연속 불러준 고마운 학교였어요. 영희는 이번 밴드 연주도 잘 이끌어야겠다고 다짐했지요. 코로나로 들썩이는 시간표 따위는 걱정하지 않았어요.


그즈음 , 영희는 금토일 제주 여행을 계획했어요. 금요일 1-2시쯤 제주에 도착하는 스케줄이었지요.


제주에서 할 일을 찾던 영희는 요트체험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후기를 쓰는 조건으로 그 요트를 무료체험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지요. 설마 될까? 싶은 마음으로 신청서를 보내고 늘 그렇듯 잊었어요.


제주에 가기 일주일 전, 학교에서 연락이 왔어요. 코로나 시간표가 여차 저차 해서 동아리 시간을 이번 주 오전 1-3교시로 당겼대요. 혹시 선생님 오실 수 있냐고, 공손하게 물어요.


이번 주 금.. 요일.. 이요? 그 짧은 순간이 나노 단위로 쪼개져 갑자기 느리게 흘러요.


영희 말고 다른 밴드부 선생님이 있었던 걸 알거든요. 그 강사는 애들 영상편집도 안 해주고 시간표도 바꿔주지 않아서 수업 차수를 채우지 못했대요. 자의인지 타의인지는 모르겠으나 영상 + 시간표가 원인이었다는 건 분명했어요. 그럼 나는? 두 번째 불러줬는데?


네 선생님,
1교시면 9시 시작이겠네요?
시간 맞출게요



전화 끊자마자 11시 비행기를 4시 비행기로 바꿨어요. 이렇게 학교 사정을 잘 맞춰주면 혹시 알아요? 다음에도 또 하게 될지.


금요일이 됐어요. 아이들과 새로운 곡을 정하고 초견 연습을 시작했는데 영희 핸드폰에 “제주 00 요트센터”가 떠요.


토요일 요트체험
신청하셨죠.
토요일은 강풍주의보라
배가 아예 안 뜬대요.
오늘은 가능한데
혹시 이따 오후에
오실 수 있으세요?



영희는 그제야 신청서가 생각났어요. 기상변화로 지정날짜에 변동이 있을 수 있으니 신청 날짜와 상관없이 제주에 머무는 시간을 써달라는 내용이었어요. 영희는 금요일 1시부터 제주에 있을 거라고 썼지요.


아니, 근데 무료체험 붙었으면 미리 좀 연락 주지 왜 전날에..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어차피 영희도 까먹고 있었기에 다른 말은 못 했어요. 안 될 거 같다고 하자 그쪽에선 친절하게도 “다음에 오시게 되면 다시 신청해주세요. 김영희 님 리뷰 기록을 저희도 쓰고 싶어서요”라고 말했어요.


영희는 아무도 탓할 수 없었어요. 동아리 담당 선생님은 분명 영희에게 “가능하실까요. 갑자기 바뀌니까 좀 그렇죠..”라며 미안해하셨으니까요. 선택권은 분명 영희한테 있었어요. 다른 강사처럼 "갑자기 바꾸는 건 좀 곤란해요"라고 해도 되거든요. 그 금요일 수업은 3회 연속 고용을 노리는 영희의 빅픽쳐일 뿐이었죠. 


영희에게 만일 정년이 보장되는 책상이 있었다면 그날 영희의 여행은 어땠을까요. 금요일 연차를 내진 않았겠죠. 대신 학교 자율휴업일에 맞춰 스케줄을 짰을 거예요. 다음 학기 수업을 위한 빅픽쳐가 뭔지도 몰랐겠죠.


어머, 그러고 보니 책상 있는 선생님은 알지도 못하는 빅픽쳐를 알고 있네요. 영희는 책상이 없어서 있는 선생님보다 늘 부족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이제 보니 아는 게 더 많은 영희였어요. 아는 것은 힘이라잖아요? 그 힘 사양하고 싶으네요.


힘 있는 영희는 더. 럽. 게. 즐거운 마음으로 4시 비행기를 탔고 그마저도 연착하는 바람에 6시에 도착했고 렌터카 빌리다 보니 해는 금방 떨어졌고 해 떨어지니 기막히게 깜깜해서 바로 호텔로 갔어요.


“제주 첫날의 첫 일정이 나랑 와인 마시는 거라고?” 하며 놀라는 제주 친구와 함께 호텔방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하루가 그렇게 지나고 있었어요.


영희는 와인을 마시며 이것도 행복이라고 주문을 걸었고 친구는 그게 바로 정신승리라고 말했어요. 영희는 친구를 때릴까 하다가 배운녀자로 그럴 수는 없어서 그냥 오래오래 행복했다고 퉁치고 끝냈답니다. 오늘의 동화 끗.


 



비정규직 잔혹동화 영희의 이야기는 오늘로 끝났습니다. 그동안 영희의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은 클러치타임님이 쓰는 충만이의 마지막 이야기가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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