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까지 더듬었다

붉은 끝동

by 음감

10년이 지나도 남는 사극 대사가 있다. 2003년 <다모>의 “아프냐, 나도 아프다”

노트북 모니터보다 작은 티비 화면이었다. 저 짧은 대사가 순식간에 자취방 공기를 헤집어 놨다. 드라마가 끝난 후 나는 새벽녘까지 랜선 게시판(다모 폐인)에서 그 순간의 감각을 더듬었다. 만일 현대극이었다면 ‘쟤 왜 저러니…’ 하겠지만 사극에서는 다른 온도가 된다.

사극의 서사 만들기는 현대극과 다르다. 붉은 끝동의 남주(산이)와 여주(덕임) 어린 시절 기억의 악센트, ‘너의 어미는 계집종이었다’ 기록을 덕임이 찢어버려서 산이는 위기를 모면한다. 현대극에서 하려면 최소 청부살인은 되어야 했을게다.

옛날 사극의 로맨스는 구색 맞추기였다. 여주는 남주의 피로를 덜어주는 일회성 카페인 정도라고 할까.

다모 이후 사극 여주는 존재 자체로 남주의 보루가 된다. 심리적인 보루 말고 진짜 보루, 남자에게 의지하지 않고 사건을 해결하는 주체적인 존재 말이다. 물론 시대에 역행하는 추노(2010)의 민폐 캐릭터도 간혹 눈치 없이 나오긴 했지만. 모든 일엔 업다운이 있으니 사극의 시대정신도 그랬다고 치자.

“네가 나에게 휘둘렸느냐 아니면 내가 너에게 휘둘렸느냐”

이것은 흡사 그 옛날 “나 너 좋아하냐?”의 사극버전이 아닐지.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이런 걸 들으라고?’ 하며 티비를 꺼버렸고 후자는 ‘이렇게 끝낸다고?’ 하며 나는 애꿎은 티비를 후려쳤다.

사극은 구조적 모순을 만들어내기 쉽다. 현대극에서 신분제를 대놓고 쓰면 날아드는 화살을 각오해야 하지만 사극에선 그 신분제 때문에 시청자가 화면 앞으로 날아든다. 더불어 무려 4회 차에 와서야 덕임이 산이의 정체를 아는 걸 보면 네이뇬 검색이 없는 시대의 낭만을 본다.

6회에서 겸사서와 함께 있는 덕임을 책망하는 산이, 그리고 봤다면 겸사서를 혼내야지 왜 나를 혼내냐고 오히려 큰소리치는 덕임. 이 티키타카에도 시대가 들어있었다.

은유 작가가 그랬다. 여자들은 반성에 익숙하다고. 남자가 잘못해도 ‘그 자리에 간 내가 잘못인가’라고 먼저 반성한다고. 덕임이 산이의 책망에 황송하옵니다를 했으면 짜증으로 꺼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덕임의 따박따박은 조선시대와 2021년의 간격을 확 좁힌다.

이어진 욕조씬, 그런 동선이 어떻게 나왔는지 아직도 이해 안 간다. 왜 넘어진 거지? 그저 클리셰였던 것인가. 다행인 건 음악은 클리셰가 아니었다. 음악 없이 호흡소리와 물소리로 채우다가 롱샷이 되면서 엔딩 음악이 나오는데 달랑 피아노 하나다. 그것도 화면과 어울리게 습기 담은 듯한 빈티지 사운드 피아노다.

만일 여기서 익숙한 구조대로 가창력 만렙 가수의 후렴구가 빵 터졌거나 어디 하나 빈 곳 없이 화음 꽉꽉 채운 스트링이 우다다다 달려 나왔으면 ‘아웅, 이렇게 끊어버린다고!!’ 하며 툴툴거렸겠다. 그런데 여백이 아주 많은 피아노가 혼자 나와버리니 툴툴거리면 뭔가 불경하게 느껴진다고나 할까. 몇 개 있지도 않은 음들이 입틀막을 해버리는 통에 입 꾹 닫고 마지막 여운을 곱씹었다.

최근 강렬했던 화제작은 하나도 보지 못했다. 오징어 게임, DP, 지옥 등등. 잔상이 너무 센 영상은 질퍽한 웅덩이처럼 나를 끌어당겨 힘들다. 대신 강렬하지만 화사한 현대 사극에 쓰지 못한 마음을 남긴다. 그들의 터무니없이 밝은 미소를 새벽까지 더듬으면서.

#옷소매_붉은_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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