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보고 쓰다

믿으며 믿지 못했던 사랑

지구에서 한아뿐

by 음감

여주 한아를 사랑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예수님 아님) 지구로 온 외계인이 있었다. 한아는 믿을 수 없었으나 인간 아님이 제 눈으로 수시로 보이는 터라 다른 방도가 없었다. 안 믿었고 믿을 수밖에.

믿고 믿지 않는 한아를 따라가면서 나는 정세랑 작가 특유의 향에 취했다. 정세랑 작가의 모든 글에서 꾸준히 흐르는 소재가 있다. 약자와 환경, 그 두 가지가 글에서 조용히 흐른다. 결연한 각오보다 스미듯 떠다니는 향이다. 외계인과의 사랑이 생각보다 편안한 이유는 그래서 일지 모른다.

뒷모습에 익숙하던 남친 경민을 여행 보낸 한아는 남친과 똑같게 생긴 경민 외계인을 만난다. 그는 지구를 구경하다가 한아에게 반해서 한아에게만 맞춘 감각 변환기를 마련하느라 긴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그의 정성에 탄복했다. 동시에 AI 같아서 나도, 한아도 뒷걸음질 쳤다. 그 간극을 또 작가 특유의 향기로 채우니 어느새 밀당 없이 그저 사랑하는 경민 외계인이 따뜻한 풍경이 된다.

말과 태도는 때로 매듭이 되어 마음에 남는다. 사랑은 서로의 마음에 매듭을 만드는 일인 것 같았다. '원래' 경민의 매듭은 한아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매듭이었다. '외계인' 경민은 다른 매듭을 엮는다. 한아의 마음을 좀 더 단단히 붙들어 놓는 버팀목 같은 매듭이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한아가 축소되고 확장되는, 그러니까 나는 분명 텍스트를 보고 있는데 눈앞에서 HD 와이드 화면으로 재생되는 듯한 그 장면에서 누군가의 마음속 매듭이 되는 일의 경이로움을 봤다. 사랑 비슷한 말도 안 나오지만 압도하는 사랑이라고 할까. 나도 같이 쪼그라지다가 같이 팽창해버리는 순간이었다. 이 급격함이 편안하게 느껴지다니.

몸속 전등을 켜는 건 이제 카페인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그들의 이야기가 내 몸속에서 따뜻한 주황빛을 켠다. 한아와 경민이 내게 만들어 준 빛을 흠뻑 들이마시는 겨울의 초입이 따뜻했다.


#지구에서_한아뿐_정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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