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이 불편하면 편의점일까. 이름 자체가 편하자는 건데 불편하면 어쩌자는 건지. 안 어울리는 형용사를 붙이는 게 유행인가, 싶은 마음이었다.
일기장 같았다. 처음에는 편의점 주인의 일기장, 그다음은 편의점 직원의 일기장, 그다음은 그 직원이 만난 어떤 손님의 일기장… 꼬리를 문 일기장이 묘하게 다시 돌아서 앞 꼬리를 잡을 때 그제야 ‘맞다, 이거 소설이었지’한다.
'불편하다'를 사전에서 보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편하지 아니하다’라는 말이 나온다. 불편한 편의점의 ‘불편한’은 이용의 불편함이 아니라 그 안에서의 관계를 말하는 모양이다. 처음엔 다들 ‘편하지 아니하’ 게 시작하는 관계들이라 그렇다.
20대 취준생 알바와 50대 생계형 알바의 관계가 편할 수 없다. 술집에서 쓰는 돈이 아까워서 편의점에서 참깨라면으로 혼술 하는 가장과 이번이 끝이라는 생각으로 골방에 박혀 글을 쓰는 30대 작가 역시 편한 관계가 될 수 없다. 어떤 상상으로도 편할 수 없는 관계들이 독고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스르르 풀린다. 독고는 그저 들어주기만 하는데도 말이다.
사춘기에 20프로쯤 발을 걸치고 있는 큰 애가 한 번씩 내게 하는 말이 있다. “그냥 들어달라는 건데 왜 화를 내냐고!” 아이가 그럴 때마다 나는 과속방지턱을 시속 100으로 넘는 것처럼 심하게 덜컥한다. 어느 순간 저 말조차 안 하고 입을 닫을까 하는 걱정이 들어서다. 한 발만 물러서면 아는데 그 한 발을 못 물러나서 기어이 잔소리 직행을 탄다.
아이에게 친절하고 싶었다. 나는 분명 친모인데 친절하지 않은 순간이 너무 많았다. 나의 친모 자리를 의심하는 와중조차 짜증이 치솟아 말이 곱게 나가지 않을 때 김혼비 작가의 위선과 위악에 대한 글을 읽었다. 진심이 어떻든 간에 겉으로 선이라면 일단 지향점은 선이니 언젠가는 그쪽으로 가지 않겠냐고.
위선적일지언정 아이에게 친절해야겠다고 다짐했을 즈음, 여기에서도 비슷한 말이 나온다.
“진심 같은 거 없이 그냥 친절한 척만 해도 친절해지는 것 같아요”
건조한 말이었지만 그 어떤 대사보다 따뜻하게 내게 닿았다. 아이에게 내가 위선으로 친절했을 때 날 서 있던 아이가 누그러지는 걸 봐도 내 마음 어느 곳엔 죄책감이 있었다. 내 연극을 들키면 어쩌지 하는 마음, 그 지점을 이 대사가 파고들어 해소시킨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아이가 누그러지면 내 마음도 같이 누그러졌으니 ‘척만 해도’ 친절해지는 건 맞는 말이다. 위악보다 위선이 훨씬 낫다.
읽으면서 나는 어느 순간 취준생도 됐고 가장도 됐다가 연금 생활자도 됐다. 셋 다 해본 적 없는 자리인데 작가의 디테일에 취해 그리된다. 또한 읽다 보면 지금 당장 뛰어가 옥수수수염차를 사 와야 할 거 같다. 텍스트로 낚이는 PPL도 있었다.
생생함이 박제된다면 딱 이런 모습일
#불편한_편의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