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보고 쓰다

7년동안 '이것'을 계속했더니

세종문화회관 공연

by 음감

1994년 6월 일본 하야시카네 조선소에서 배 한 척이 건조됐다. 20년 후 이 배의 국적이 한국으로 바뀌면서 정원 809명은 921명이 됐다. 무게중심은 51cm 높아졌고 무게는 239t 더 무거워졌다.


배의 최대 화물적재량은 1077t이었다. 그날은 2142t을 실었다. 배의 복원성을 유지하려면 최소 1694t의 평행수를 실어야 했다. 그날은 761t을 실었다.


30프로쯤 가라앉은 배가 전국으로 생중계되면서 ‘전원 구조’ 자막이 떴다. 배 안에 자식을 태운 부모들은 그 자막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알고 싶었다. 저 숫자들의 간극이 어떻게 나왔는지 또한 알고 싶었다. 묻고 또 물었다.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한쪽은 계속 묻고, 한쪽은 계속 침묵하는 상황은 비단 바다에만 있지 않았다. 부모들은 그제야 선연한 깨달음이 왔다. 그 후 7년 동안 그들은 노래했다. 부당해고를 당한 사람들 옆에서, 위안부 할머니 곁에서, 휴대전화 부품을 만들다 실명한 노동자들 앞에서, 스텔라 데이지호 실종 선원 가족들 곁에서.


노래한다고 답이 나오진 않았다. 노래한다고 치유되거나 완벽한 애도가 되지도 않았다. 다만 슬픔은 슬픔에게, 고통은 고통에게 다가갔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7년의 합창이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책을 읽기 전까지는 가늠되지 않았다. 지옥을 노래로 한다는 게 말이 되나 싶었다. 보고 읽으면서 알았다. 지옥이기에 노래하며 같이 있어야 했다. 같이의 힘으로 하는 그들의 노래가 울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뚫어서 새로운 길을 내고 있었다. 그 길이 더 많이 뻗어갈 때 효율이라는 명함 뒤에 묵살된 수많은 죽음이 말할 기회를 얻을 것이다.


공연 중 질문시간이 왔다. 아이 역할을 맡은 단원 한 명이 관객석을 보며 물었다. “엄마는 416 합창단 하면서 언제가 제일 좋았어?”


단원 중 한 명에게 핀 조명이 닿았다. “너 가고 나서 니 동생이 줄곧 게임만 했잖아. 어느 날 외출했다 집에 왔는데 걔가 우리 합창 시디를 니 방에 크게 틀어놓고 방 가운데 가만히 서 있더라. 그때 합창단 하길 잘했다 싶었지”


공연 중 훌쩍이는 건 그렇다 치는데 끅끅대는 건 안 될 거 같았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여기부터 나는 공연장 천장만 뚫어지게 봤다. 무대를 보지는 않았지만 들리는 고백의 문장들이 내게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조각에 이리저리 치이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입술을 더 세게 깨무는 일 말고는 없었다.


공연이 끝나고 밖으로 나왔다. 노란 조명이 작은 정원을 빼곡히 덮고 있었다. 공연 내내 흘렀던 별이 된 아이들이 공연장 밖에서도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올 겨울에는 연말을 장식하는 노란 조명 빛이 다르게 보일 거 같았다. 아니, 올 겨울만이 아니라 늘 그리 보여야 할 것이다.


#노래를불러서_네가온다면

#416합창단

#세종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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