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기억
어릴 때 우리 집엔 칼라 티브이, 흑백 티브이가 각 한 대씩 있었다. 칼라 티브이 앞 나는 오후 5시 반부터 밤 9시까지, 그러니까 스머프부터 수사반장까지 집중할 수 있었다. 반면 어쩌다 흑백 티브이를 보는 날의 내 집중력은 습자지보다 얇았다. 화면이 흐릿하면 소리도 흐릿하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의 마음이 되어 결국은 꺼버렸다. 안 보고 말지.
우울한 글이 내겐 꼭 흑백 티브이 같았다. 글 자체가 노이즈였다. 노이즈는 흑백 화면 속 지지직 거리는 선을 수없이 만들었다. 어수선하게 흘린 부스러기 절망이 발끝에 걸려 읽는 집중도가 떨어졌다. 흑백 티브이를 오래 보기 싫은 것처럼 우울한 글이 딱 내게 그랬다. 행여 그런 글이 눈에 보이면 무거운 추로 꾹꾹 눌러버렸다. 너한테 내 시간을 주기 싫거든!
이 책을 읽으며 우울한 글도 칼라와 흑백이 있음을 알았다. 칼라적 우울은 일곱 살의 칼라 티브이처럼 꼼짝없이 나를 붙들어 버렸다. 이슬 맞은 잠자리 날개처럼 우울이 반짝였다. 나는 우울한 글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흑백 티브이 같이 장외가 더 시끄러운, 혹은 ‘나 슬퍼 죽겠네’의 비명만 가득 찬 글을 싫어하는 거였다.
이 책의 저자는 오래도록 가두어둔 슬픔이 있었다. 어떤 일을 계기로 가둬놓은 슬픔이 한꺼번에 밀려왔고 작가는 기록한다. 그 기록이 노이즈 하나 없이 깔끔한 칼라 티브이라서, 아니 HD급이라서 다양한 빛이 쏟아진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초반에 나온 이야기 뒤의 무거운 그림자를 봤을 때는 그가 남기는 기록의 구조를 다시 들여다봤다. 서럽게 완벽한 구조였다. 그 완벽함은 내가 겪은 일도 아닌데 내게 꼭 맞는 어둠이 됐다. 아주 빠르게 느릿느릿 읽고 싶었다. 작가 엄마가 또 어떤 문자를 남겼나 궁금해서 빨리 읽고 싶었고 빨리 읽어서 더 이상 읽을 게 없을까 봐 느릿느릿하고 싶었다.
지울 줄도, 채울 줄도 모르고 그 자리에서 박제되어 버리면 삶은 편집 없이 그냥 풍경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작가의 어린 시절이 그랬다. 그 풍경의 의미를 나중에 깨달았을 때 어떤 풍경은 확고한 슬픔이 되어 그를 조준했다.
누군들 그런 조준이 반가울까. 당연히 피하고 싶었겠지만 작가는 그마저도 자기의 세계로 쌓는다. 바라는 의지와 현실의 환경이 절망적으로 엇갈려도 그 엇갈림으로 쌓아가는 세계가 있었다.
읽는 두 시간 동안 세찬 장대비를 맞는 기분이었다. 아플 정도였지만 비가 그치자마자 나는 강력하게 헹궈진 듯했다. 작가가 글을 통해 실어 나르는 타인의 세계에 정확하게 도착했음을 알았다. 동시에 내 선입견으로 그냥 눌러버려서 못 보고 지나친 이야기가 얼마나 많을까 싶어졌다. 눌러놓기 용으로 썼던 무거운 추가 조금씩 자리를 비켜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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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