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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Jan 16. 2022

엘리야와 김연아의 MBTI는 같다

승리, 그 이후

2020년은 김연아 선수가 밴쿠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지 10주년 되는 해라고 한다. 다른 선수들도 메달 딴지 10주년을 기억하는 경우가 있었나? 스무 살에 세계를 제패한 것도 놀라운데 10년 동안 사랑받는 것도 더 놀라워서 인터뷰 몇 개를 찾아봤다.


기자 : (목에 걸린 메달을 가리키며) 메달 보면 어떤 생각이 들어요?

김연아 : 메달이구나...

읽자마자 푸핫, 웃음이 터졌다. 승리에 취하지 않는 거 보니 엘리야랑 비슷하네?

구약성서 열왕기의 엘리야도 대승의 전적이 있다. 바알신과 여호와 중 누가 먼저 제단을 태우느냐의 내기였다. 바알신 선지자 450명이 먼저 한나절 내내 부르짖었으나 바알신은 침묵했다. 그들이 지쳐 나가떨어졌을 때 엘리야가 간구하니 바로 불이 내려와 제단을 태워버렸다는 이야기다. 450 대 1에서도 여유 있는 압승을 거둔다.

김연아 선수도, 엘리야도 그 정도의 승리를 거머쥐었다면 승리에 취해 살아도 되지 않나 싶은데 김연아 선수는 ‘메달이구나’가 끝이다. 심지어 엘리야는 다음날 도망간다. 자기편의 대패에 열 받은 이사벨의 저주가 무서워서 그랬다.

김연아 선수도 올림픽 후 은퇴하고 싶었는데 여론의 압박이 힘들었다고 말했다. 이쯤 되면 승리의 순간보다 그 후가 더 피곤한 건가 싶다.


여호와는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어 위로한다. 두려움에 떠는 엘리야를 버려두지 않은 건 고마운 일이나 그 정도 대결을 펼쳤으면 애프터서비스까지 확실하게 해 주면 얼마나 좋아. 이사벨 심근경색으로 사망, 원인은 엘리야 협박죄로 하늘의 징계를 받음. 뭐 이런 거 말이다. 그랬으면 엘리야가 좀 더 자신감 넘치지 않았을까?


엘리야의 도망자 라이프 40일 후, 여호와가 묻는다.


   “너 왜 여기 있니?”

   “저 여호와를 위해 진짜 열심히 일했는데 다들 죽고 저만 남았어요. 저들이 나를 죽이려고 합니다”


엘리야의 말을 들은 여호와는 “저런. 너 진짜 열심히 했는데 힘들었겠구나. 잠깐 기다려. 내가 처리해줄게.”라고 대답하지 않고 대신 밖에 나가 산 앞에 서라고 한다. 그랬더니 강풍이 불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고 지진이 난다.


엘리야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무섭다고 하는 사람 밖으로 끌어내더니 산과 바위와 땅이 갈라지는 걸 보여주면서 딱히 전하는 말도 없다니. 그 후에 신은 너 왜 여기 있느냐고 같은 질문을 하고 엘리야 역시 아까와 똑같이 대답한다.


엘리야의 대답을 들은 신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할 일을 지정해 준다. 광야로 돌아가서 얘를 왕으로 세우고 걔를 너 대신 선지자로 세우라고 한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응답이란 말인가. 지금 내가 무서워 죽겠다는데 대꾸도 안 하고 to do 리스트를 주는 신이라니.


이해 안 가서 덮어버렸던 엘리야 이야기를 김연아 선수 인터뷰로 다시 폈다. 김연아는 부담감으로 잠적했다가 결국 다시 나와서 후배들의 길을 열어줬다. 김연아는 그냥 그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판단한 게 아닐까. 엘리야에게 속 시원한 답을 해주지 않은 여호와도 그저 엘리야가 해야 하는 일을 하도록 판을 깔아준 게 아닐까.


 450대 1로 싸워 이길 일도, 어떤 분야의 한국 최초 금메달리스트가 될 일도 나에겐 없다. 없어도 김연아가, 엘리야가 일구는 하루를 따라 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날 해야 할 일을 하는, 너무 단순하지만 알고 보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못하는 그 지점 말이다.


내가 그렇게 산다고 해서 그들처럼 드라마틱한 승리가 없을 거란 걸 잘 안다. 그래도 그들 승리 후의 이야기는 '인생의 의미가 뭘까'를 찾기보다 '인생의 의미를 어떻게 만들까'로 고민의 자리를 옮겨준다.


내세울 것 없는 인생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면 너무 어렵다. 대신 하루를 어떻게 만들까라고 고민하면 성과에 상관없이 내가 의미를 부여하니까 답이 쉬워진다. 이 발견만으로도 엘리야에게, 김연아 선수에게 고마워지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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