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음감 Jan 17. 2022

나의 ‘우리’는 어디까지인가

바벨탑을 짓는 사람들

창세기 10장은 바벨탑의 이야기다. 사람들은 바벨탑을 통해 그들의 이름을 세상에 강조하고 더 단단한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했다.

하늘에 닿을 만큼 까마득히 높은 탑을 지어서 이름을 떨치고 흩어지지 말자라고 하는 말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우리끼리 열심히 잘해보자’ 로 읽힌다. ‘우리’가 모두를 포함하지 않는 한 분명 ‘우리’ 밖의 사람들이 남는다.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코로나 초기, 여행업이 직격탄을 맞으면서 40조의 기간산업 안정자금이 풀렸고 그 중 몇 조는 항공사로 갔다. 하늘길이 막혔으니 그들을 도와주는 일은 당연해보였다.


안정자금은 항공사라는 바벨탑의 '우리'에게만 지급됐다. 깨끗한 비행기를 위한 필수인력인 청소 관리 하청업체 직원들은 기금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항공사에게 청소인력은 '우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각 가정에도 긴급재난 지원금이 ‘세대주’를 통해서 지급됐다. 세대주와 함께 살지 않는 사람은 ‘우리’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했고 재난지원금도 닿지 않았다. (21년에는 다행히 세대주가 아니어도 받을 수 있게 수정되긴 했지만)

‘우리’는 나와 이해관계에 있어야 한다. 나와 바벨탑을 함께 쌓는 사람만 ‘우리’다. 우리 아파트의 학군 유지를 위해 우리 아파트의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우리 아파트에서만 배정 받아야 한다. 우리 동네의 시각적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장애우 학교를 우리 동네에 세우면 안 된다.

넘치는 재활용 쓰레기는 우리와 상관없는 남의 나라에서 재깍재깍 수입해가야 한다. 커피와 같은 기호품은 그게 어떻게 생산되는지 상관없이 남의 나라에서 값싸게 들여와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쌓은 바벨탑은 팬데믹으로 회귀했다. 동물의 공간을 인간이 침입하면서 종간변이를 일으켜 ‘우리’를 파고드는 바이러스가 됐다. 이 사태는 다시 인간의 ‘우리’를 구분하면서 세계의 약육강식을 심화시킨다.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는 신의 명령은 어느 한 곳에 탑을 높게 쌓아 거기에 집중하는 인간에게 일침을 놓는다. 신은 바벨탑을 쌓는 인간들의 언어를 다르게 하는 방법으로 하루아침에 연대를 깨버렸다. 21세기의 바벨탑은 펜데믹으로 한번 깨졌고 그 여파로 또 높아지는 바벨탑은 또 어떤식으로 깨질지 아무도 모른다.


신이 인간의 연대를 의도적으로 깨뜨리는 그 마음을 같이 품어야 한다. 우리의 범위가 넓어질 수록 펜데믹이 설 땅은 좁아질 것이다. 마스크 없이 서로를 마주보는 그날을 꿈꾼다.

매거진의 이전글 엘리야와 김연아의 MBTI는 같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