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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Jan 18. 2022

키 155와 165 사이에서

다윗의 답

나의 첫째 아이는 반에서 키가 중간에도 못 들었다. 아이가 ‘나는 언제 키 크냐고’ 송을 불러대서 결국 대학병원 성장 클리닉 예약을 했다. 대기에 대기가 꼬리를 무는 지루한 검사과정을 끝내고 의사가 말했다.


“165 까지는 클 거 같아요. 그런데 오차 범위가 좀 있어요. 10cm 정도?”


이렇게 애매한 대답을 듣기 위해 하루를 통째로 날리며 대기했단 말인가. 씩씩거리며 집에 오는 길에 다윗 이야기가 생각났다.




다윗은 유부녀 밧세바를 왕궁으로 불러들여 동침한다. 나단 선지자의 꾸짖음으로 회개를 하긴 하지만 이미 엎어진 물, 나단은 그 동침으로 태어난 아기가 죽을 거라고 예언한다. 정말 아기가 태어났고 병에 걸렸다.


다윗은 아이가 살아있을 때는 울며 금식기도 하다가 아이가 죽은 후에는 털고 일어나 씻고 먹는다. 신하들이 의아해하자 다윗은 이렇게 대답한다.


“아이가 살았을 때는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혹시 아이를 살려주실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소. 그러나 이제는 아이가 죽었는데 내가 무엇 때문에 금식하겠소? 내가 그를 다시 살릴 수 있겠소? 언젠가 나는 그에게로 가겠지만 그는 나에게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오”


사람이 살고 죽는 문제와 키가 10센티 더 크고 안 크고의 문제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의 구분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다윗의 대답이 내게도 대답이 됐다.




더 이상 ‘나는 언제 클까’ 송을 부르는 아이의 장단에 같이 날뛰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되도록 균형 맞는 식단의 상을 차리고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영양제를 먹이는 것, 이걸 다 지킨다 해도 성장 메커니즘을 내가 다 알 수는 없다. 그저 내게 가능한 일을 할 뿐이다. 다윗이 그의 기도가 가능한 때에 최선을 다했던 것처럼.


아이가 고민할 때 달래주다가도 어느 순간 “그러니 편식을 좀!”하고 욱 터져 나오기도 했다. 적어도 이제 그렇게 터져 나오지 않는다. 내가 안정되니 아이의 ‘언제쏭’도 좀 줄어들었다. 키의 허들은 다윗 덕에 이렇게 넘었다. 넘고 나니 다윗이 다른 질문을 던져줬지만.


다른 질문 : 썅년과 썅놈 사이에 누가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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