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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Jan 20. 2022

대리모 실패를 축하드립니다

사래. 사라. 하갈

“저기요...제게 자식이 생길거라면서요... 지금까지 없잖아요? 이러다간 나의 재산을 모두 종 엘리에셀 물려주게 생겼다요!” (자식이 없으면 종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게 당시 풍습이었다)


창세기 16장에서는 아브람이 신에게 이렇게 고민을 토로한다.


아브람의 토로에 신은 “놉, 니 몸에서 나오는 자가 니 상속자가 될거야!”라고 말한다. 좀 애매하긴 하다. 니 몸에서 나오는 자...라고만 하면 그 씨를 받는 사람은 상관없다는 뜻처럼 들리니까.


콕 찍어서 “너와 사래의 사이에서 나온 자가 니 상속자가 될거야” 라고 했으면 아마 창세기는 다른 기록이 되었을지 모른다.




자식이 없던 사래(Sarai. 후에 Sarah로 개명한다)는 아브람에게 여종 하갈과 동침하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을까 하노라”


USB 판에는 “She can have a child for me”라고 나오고(나를 위해 하갈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 NIV 판에는 “I can build a family through her”(하갈을 통해 내가 가정을 세울 수 있다)라고 나온다.


'네 몸에서 나오는 자'라는 신탁을 받았으니 사래는 아브람의 자식이기만 하면 누가 낳든지 상관없다고 생각했겠다. 누가 낳든 아브람의 아내는 오직 본인이라고 믿었던 거지. 하갈이 낳았다고 해도 ‘나를 위해’ 자식을 낳는 거고 하갈을 통해 ‘내가’ 가정을 세운다고 말하니 말이다.


사래는 철저하게 하갈을 대리모로만 생각하는 거 같다. 같은 여자끼리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하고 싶지만 사래 역시 시절의 지배를 받는 인간이었기에 여종에게 대리모를 시키는 걸 당연하게 여겼을 수도 있다. 더군다나 신탁까지 받지 않았는가. 아브람 역시 아무 저항 없이 사래의 말을 따른다(젊은 여자랑 동침하라는데 싫다 할 할아버지는 없;;)


사래의 원래 계획과 무관하게 하갈은 사래의 심기를 건드렸고 아브람은 침묵한다. 열 받은 사래는 하갈을 쫓아낸다. 이때도 아브람은 일체의 개입이 없다. “내명부의 일은 관여할 바 아니다”라고 하던 조선왕조 사극의 대사는 알고 보니 꽤 세계화(?)스러웠다.




이때까지 침묵하던 신은 그제야 나타나서 하갈에게  “아무도 셀 수 없는 많은 후손을 너에게 주겠다”라고 말한다. 창세기의 여자들 중 사래만큼 주목받은 자가 없는데 사래보다 하갈이 먼저 자손의 축복을 받았다니 놀라웠다. 이 서사가 생각보다 알려지지 않은 것 또한 놀라웠다.


앞뒤의 이야기를 끼워 맞춰 본다. 신이 아브람과 사래에게 아이를 주겠다고 해놓고 10년 이상 소식이 없었으니 사래는 시절에 걸맞은 다른 방법을 궁리했고 그 빅픽쳐가 예상대로 흐르지 않으니 하갈을 쫓아냈다. 신은 그런 하갈을 사래보다 먼저 챙긴다.  


애초에 신이 하갈의 임신을 막았으면 되잖아!라고 할 수 있다. 그건 성경 속 신의 스타일과 안 맞는다.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니 말이다. 모든 일이 신의 계획 속에만 있다면 인간은 그저 꼭두각시 이상이 될 수 없겠다.   


하갈의 마음이 궁금했다. 나이 많은 주인과 동침할 때 신분상승을 꿈꿨을까, 아니면 체념했을까. 임신 후 사래에게 무례하게 굴었다는데 누굴 기준으로 하는 무례일까. 대리모를 시킨 거 자체가 이미 무례한 일 아닌가.


아무리 시절이 그렇기로서니 대리모로만 존재하라고 하는데 그저 순종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하갈의 이야기를 다시 그려보고 싶다. 시절에 밀려 대리모가 됐지만 본인 삶을 대리모로 끝내지 않았던 당찬 여자로 다시 조명해줬으면 좋겠다.


기록되지 못했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시대와 기준이 바뀌니 그렇다. 시절 중력에 깔려 기록되지 못한 삶과 죽음을 더 많이 기억하고 싶다. 삶을 지탱하는 지혜는 기록된 것에서만 찾는 게 아닐테니 말이다. 그렇게 하갈과 사래의 대리모 실패 프로젝트에 축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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