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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Jan 22. 2022

남편노무스키를 다시 읽다

한나, 브닛나, 남편노무스키

성경에는 <~의 기도>로 유명한 사람이 몇 있다. 그중 여성의 기도로 치면 한나의 기도가 가장 많이 알려졌다. 한나의 기도는 신을 감동시켰다고 한다.


나는 난임 병원의 도움으로 아이를 가졌다. 난임 병원 여성들의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보면 임신은 여자의 밥값이다. 임신과 밥값의 상관관계가 21세기에도 이토록 굳건할 줄이야.


21세기도 그럴진대 한나의 시대는 어땠을까. 아이를 낳지 못하는 한나는 밥값을 넘어 존재를 부정당했을 수도 있겠다. 난임 병원을 다니며 그런 한나가 생각나서 다시 읽었다.  




내가 배운 한나는 핍박을 당해도 싫은 소리 안 하고 서원기도를 하는 우아한 여인이었다. 다시 읽는 한나는 스우파의 쎈 언니 느낌이었다.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악인은 흑암 중에 잠잠하고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라’라고 하는 기도가 있어서다.


한나의 남편은 한나와 브닛나, 두 명의 아내가 있었다. 일부다처제 시절이었나 보다. 아이를 낳은 브닛나는 한나를 핍박했다고 성경에 나온다. 한나가 브닛나를 콕 찍진 않았지만 ‘너 두고 봐!’ 식의 기도가 느껴진다.



다 기록되어 있는데 왜 쎈 한나는 빼고 우아한 한나만 강조됐을까. 성경을 스스로 읽는 사람이 적으니 시절이 원하는 대로 편집했을까… 식의 의문이 생긴다.


두 번째 의문, 본인 할 일을 제대로 못하는 한나 남편은 왜 안 깔까?


한나의 남편은 브닛나보다 한나를 더 아꼈다. 한나가 힘들어할 때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ᆢ 낫지 아니하냐’라며 위로한다. 보자마자 뒷골이 뻐근했다. 자상한 척하면서 악역은 안 하는 전형적인 책임회피다. 


정말 한나를 위로할 생각이면 일단 브닛나의 횡포를 막았어야 했다. 하긴, 이런 남자는 지금도 흔히 보인다. 알고 보니 유서 깊은 성향이었쒀...  



브닛나는 애를 잘 낳았으니 시절 기준으로 분명 칭찬받을 아내다. 그런데도 불임의 아이콘 한나를 저보다 더 사랑한다면 브닛나도 열이 받았겠지. 그럼 이건 순전히 남편느므스키의 처신 문제다.  아내를 둘 데려왔으면 그 사이의 조율도 그의 책임이니까. 시대가 그의 책임을 방관했겠지만 21세기에 읽는 사무엘서는 그렇게 초반부터 깊은 빡침을 부른다.


한나의 기도 전에 남편느므스키의 애매한 처신을 지탄하는 말이 먼저 나왔어야 하지만 시대가 그렇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 기도의 결과로 사무엘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왔으니 은혜롭지 않은 이런 의문은 묻혔나 보다.


자신의 고통을 너머 서원기도 하는 한나는 그간 많은 칭찬을 받았다. 내가 한나라면 그 칭찬 별로 안 반가울 거 같다(물론 나는 한나 깜냥이 안된다. 말이 그렇다는거다) 이제 시절의 무게로 적히지 못한 남편의 애매함을 콕 찝어줬으면 좋겠다.


 더불어 한나의 스우파 버전 기도도 더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 고전이 특정 시절의 해석으로만 숨 쉰다면 굳이 지금의 우리가 읽을 필요가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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