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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Jan 24. 2022

해야 할 말을 안 하면 이 꼴 난다

아합과 이사벨과 나무꾼

누가 봐도 아닌 건 말을 해야 한다. 내게 떨어질 콩고물에 혹해서 ‘침묵은 금이다’를 갖다 붙이면 더 큰 대가를 치른다.


전래동화 <선녀와 나무꾼>의 나무꾼은 사슴이 선녀 옷 훔쳐서 장가가라고 하니까 말없이 따른다. 나무꾼이 제대로 생각이 박혔다면 진짜 할 말이 없었을까? “사슴아, 목욕하는 사람 옷을 훔치면서까지 장가가는 건 너무 치사스러워.”라고 말했어야 한다.


나무꾼만 그러는 것도 아니다. 구약성서의 북이스라엘 왕 아합도 그랬다. 그는 산책길에 마음에 드는 포도원을 발견하고 포도원 주인 나봇에게 그 땅을 넘기라고 한다. 나봇은 거절했고 아합은 속상한 마음에 집에 와서 드러눕는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땅을 사고팔 수 없었다. 땅은 여호와가 조상에게 줬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 산다면 누구나 아는 법이기에 나봇도 왕에게 당당했고 왕도 더 이상 우기지 못했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를 아내 이사벨에게 한다. 이스라엘 법 이야기는 쏙 빼고 그저 갖고 싶다는 말만 한다. 이세벨은 뭐 그런 거 걱정하냐며 내가 그 땅을 당신에게 드리겠다고 말한다. 아합이 판단이라는 걸 하는 사람이면 이세벨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저기, 당신이 다른 나라에서 와서 이 나라 법을 모르나 본데... 이건 왕권으로도 못할 일입니다.”


(물론 주석에서는 이사벨도 이미 알고 있었다고는 한다. 둘 다 알지만 둘 다 침묵한다)


나무꾼이 사슴에게 침묵했듯 아합도 이세벨에게 침묵한다.  이세벨은 사전 모의를 끝내 놓고 나봇을 끌어와서 “이 자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증인도 두 명이나 있다.”라고 모함한다. 결국 나봇은 중죄인이 되어 돌에 맞아 죽고 이세벨은 포도원을 아합에게 준다. 아합은 얼씨구나 하고 포도원을 보러 내려간다.




“할 말은 해야지”는 밖에서 보면 당연한 말인데 막상 당사자가 되면 쉽게 흔들린다. 특히 내가 말을 안 했을 때 생기는 이익이 보이면 더욱 말을 안 한다.


순간의 욕심과 편안함을 위해 ‘해야 하는 말을 하는 나’를 버리면 버려진 내가 편안한 내게 책임을 묻는 순간이 온다. 책임을 버린 나와 욕심을 채운 나 사이의 가루들이 삼투현상으로 조금씩 교차되다가 결국에는 책임 쪽이 커져버린 그때, 나무꾼은 영원히 가족을 만나지 못하는 벌을 받고 이세벨과 아합 역시 여호와의 저주를 받았다.  




배우 엠마왓슨은 원영 월드(One young world, 젊은 지도자들이 모여 세계적인 이슈들에 대한 해결책을 개발하는 비영리 단체)의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
If not me, who?
If not now, when?


이 물음은 비단 한 단체에게만 하는 질문은 아닐 것이다. 나무꾼처럼, 아합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침묵을 지키는 비겁자가 되지 않기를. 나도, 당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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