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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Jan 15. 2022

너의 목소리가 궁금해

사라의 기록

내가 걸음마를 하면서부터 우리 부모님은 부부싸움을 했단다. 엄마가 나를 금이야 옥이야 할 때 아빠는 과잉보호라며 엄마를 말리는 식의 싸움이 내가 청소년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원인제공은 나였지만 그 싸움을 보는 게 지겨웠다.

 창세기를 읽었다. 싸울 수 있고, 그 싸움이 후대에 전달되었다는 게 진일보한 세계관으로 느껴졌다. 아브라함과 이삭 때문에 그렇다.

사라는 태가 닫힌 지 한참인데 무슨 자식을 바라냐며 손사래 쳤는데 이삭이 생겼다. 이십 대 중반에 나를 낳은 엄마도 그리 귀했다는데 백 살에 얻은 자식이라니 상상도 안 된다.

그런 자식을 죽여서 제물로 드리라는데 사라의 이야기는 한마디도 안 나온다.  만일 사라에게 말하지 않고 이삭을 데려갔으면 정말 상종 못할 지아비인 거고,  말을 했는데 사라가 아무 반응 없었다면 그것도 놀라운 일이다.

다 떠나서 내가 아이를 낳고 보니 사라 기록 자체가 없다는 게 이상했다. 싸움을 했던, 저세상 수준의 순종을 했던, 사라의 반응이 있어야 한다.

성경 자체가 기록으로서의 역사이긴 하다. 그럼 기록 유무에 시대적 맥락이 당연히 들어갔을 거다. 그 시절의 맥락에서 어미의 충격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나 보다.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그러니 이제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 이야기에 사라도 들어갔으면 좋겠다. 늙은 몸으로 아이를 낳고 기르는데 제일 고생한 건 사라일 텐데 그의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이 ‘아들 바친 아브라함’만 존경하면 낳고 기르는 수고는 무시하는 일이 아닐지.

성경을 다시 쓸 수는 없다. 다시 이야기할 수는 있다. 시대의 맥락으로 삭제되었던 여성의 이야기를 합리적 상상으로 불러들여 같이 나눌 수 있는 강단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사라의 목소리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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