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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Jan 14. 2022

너 같으면 안 찾겠냐

없어진 소년 예수

친구네 가족과 강원도 여행 중 횡성의 풍수원 성당에 들렀다. 1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성당이라고 했다.


코로나로 성당 내부는 들어갈 수 없어서 산책로로 갔다. 완만한 경사가 이어지다가 어느 지점부터 갑자기 급경사 내리막이 됐다.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부모들은 “천천히 가!”를 외쳤으나 가속도를 이기지 못한 우리 집 둘째가 넘어졌다.


아이가 넘어진 자리 옆의 작은 정자에는 예수의 공생애 중 몇 개를 정리해 놓은 글과 그림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 알지 못하셨나이까’  부분이었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그러게, 예수님 부모씩이나 하면서 왜 몰랐어’의 마음이었다. 아이를 낳고, 아이가 이 말이 쓰인 정자 앞에서 넘어지는 걸 보니 달리 보였다. 내 눈앞에서 넘어져도 가슴이 철렁하는 게 부모다. 아예 내 눈앞에서 아이가 사라졌는데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같이 간 친구에게 말했다.


 “애가 넘어진 앞에 저런 글귀가 있으니 짜증 나. 어느 부모가 안 놀라겠어. 마리아나 되니 듣고 넘어갔지. 나 같으면 ‘너 지금 말이면 단 줄 알아? 혼자 잘나서 혼자 큰 줄 알지!’ 하고 대폭발 했을 거야.”




BECNT 누가복음 1권 Darrell L.Bock(대럴 벅)의 주석이 있다. 이 학자는 누가보다 누가를 더 잘 안다고 평가받는다. 여기에서는 예수가 ‘아버지의 집’이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과 본인이 부자관계임을 암시하는 표현이라고. 예수는 분명 자신이 누군지 알고 그것을 드러냈지만 마리아와 요셉은 그런 예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다.


대럴이 직접 애를 키워본 적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기 예수라고 해서 생후 백일 전부터 통잠 자고 걸음마 배울 때 저지레 안 할 리 없다. 모성애도 부성애도 아이가 생긴다고 자동으로 따라오는 게 아니다. 육아의 피곤과 애정과 황홀과 구질구질함이 편집 없이 들어찬 시절을 겪으며 길러진다.


열두 살 아들이 처음 가 본 도시에서 없어졌는데 신생아 시절의 예언을 떠올리며 ‘음, 이제 나의 아이가 본인의 사명을 펼칠 때가 되었군’이라고 했다면 그 시절을 진하게 겪지 못한 부모가 아닐까.




시대가 변하면 해석도 변한다. 조선왕조실록의 텍스트는 그대로 일 텐데 1990년대에 요부로 그려진 장희빈이 2천 년대에는 비운의 여인으로 그려진다. 5백 살 먹은 조선왕조실록이 시대에 맞춘 해석을 입는다면 2천 살 먹은 성경도 어느 정도는 그래야 하지 않을까.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의 신성을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라 아기 예수와 애착 형성하는 시기를 제대로 보냈기에 당연히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다고 텍스트에 없는 부모 마음을 상상해줬으면 좋겠다.


대럴 벅이 성서 전문 학자라 해도 그가 모든 세월의 변화를 담을 수는 없을 터. 그러니 지금의 교회가 추론 가능한 상상을 나누는 것도 의미 있겠다.


아기 예수를 키우느라 그의 신성은 잠깐 잊었다고, 그 잊음이야말로 육아현장을 제대로 지난 증거였을 거라고. 소년 예수님이 어미의 마음을 헤아리기엔 조금 어렸을 수도 있다고.


그런 이야기를 하면 불경하다고 쫓겨날까. 어차피 쫓겨나기 전에 똑같은 이야기가 지겨운 사람들이 제 발로 나가는 거 같은데?


한국 교회가 ‘어찌하여 변하지 않으셨나이까’의 질문을 받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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