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보고 쓰다

말린 귤껍질이 되는 영화

노웨어 스페셜_Nowhere special

by 음감

존은 4살 아들 마이클을 혼자 키우는 아빠다. 그는 시한부를 선고받고 죽기 전에 마이클의 입양가정을 찾겠노라 결심한다. 불치병에 걸린 친부가 아이의 입양가정을 찾는다는 실제 신문 광고를 모티브로 해서 만든 영화, 노웨어 스페셜 Nowhere special이다.

존은 창문 청소부다. 영화 초반에 유난히 창문이 많이 나온다. 감독은 창문을 통해 존의 변화, 더 크게는 삶과 죽음의 관계를 말한다.


존은 일을 하면서 창문 안을 들여다본다. 그 안에는 타인의 일상이 있다. 장난감 가득한 마이클 또래의 아이방이 있고 아빠 엄마의 살뜰한 보살핌을 받는 백일 즈음의 아가도 있다.


존이 창을 닦으면 그 안의 일상은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그의 직업을 창문 청소부로 설정한 감독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코앞에서 선명하게 보이지만 존은 결코 닿을 수 없는 일상이라 그렇다.


존이 죽음을 대하는 방식이 그랬다. 코앞에 닥친 죽음이지만 아들 마이클에게는 결코 닿지 않을 것처럼 제대로 말하지 않는다. 그저 좋은 입양가정을 찾으면 다 해결된다고 믿는다.


영화에서 창문이 나오면 존은 항상 그 밖에 있었다. 어느 순간 존이 창문 안에 있었다. 존과 쇼나가 빵집에서 만나는 장면이다. 쇼나는 입양관리 기관의 직원이다.


입양 기관의 규정 역시 창 안쪽의 존재였다. 존이 창 밖에서 닿을 수 없는 마음으로 안을 바라보듯 쇼나도 창 안쪽에서 존에게 닿을 수 없는 상담만 했다. 당연히 상담의 효과는 없고 존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쇼나와 존이 기관 밖에서 만났을 때, 그러니까 그들 사이에 창이 없을 때 쇼나는 그간 창에 가려 존에게 못했던 말들을 한다. 그제야 쇼나에게 설득된 존은 죽음을 일상으로 받아들인다. 그 일상이란 마이클에게 죽음을 설명하고 그가 없는 미래를 위해 마이클에게 편지를 남기는 일이다.


영화 초반에 그렇게 많이 나오던 창은 존과 쇼나의 빵집 장면 이후 자취를 감춘다. 존은 창 없이 직접 현실을 본다. 마이클이 살 가정은 창 없이 소통해야 하는 곳이라는 기준을 세운다. 지금까지 방문했던 집 중에서 가장 초라한,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싱글녀의 집을 입양가정으로 결정한다.


다른 집들은 마이클과 직접적인 소통이 없었다. 그들 가정이 얼마나 훌륭한지 전시회 하듯 보여주기만 한다. 반면 그 싱글녀(이름도 안 나온다)는 심심해 보이는 마이클을 위해 장난감 트럭 앞에 무심히 사탕을 쏟아놓는다.


마이클은 물음표로 여자를 바라본다. 여자는 또 무심하지만 싱긋 웃으며 “돌멩이. 여기에 실어봐”라고 말한다. 마이클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사탕을 트럭에 싣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다시 여자를 본다. 여자는 존과 이야기를 하다가도 “몇 개 들어갔어?”라고 질문해주고 마이클은 또 신나게 사탕 개수를 센다.


명문 기숙학교를 보내준다는 집, 좋은 인형을 가지고 놀게 해 줬던 집 모두 마이클에겐 창 안쪽의 일이었다. 마이클에게 선명하게 보이긴 하나 직접 닿는 일은 하지 않았다. 마이클은 집에서 혼자 놀 때 사탕을 돌멩이라고 하면서 트럭에 쌓는다. 창 없이 직접 부딪히는 의미를 존은 마이클의 놀이에서 또 본다.


존이 그 여자의 집을 입양가정으로 결정하고 다시 집에 가는 모습을 카메라가 롱샷으로 잡는다. 그들은 걷고, 버스를 타고 계단을 오른다. 차를 타고 갔다면 그 모든 과정이 창 안쪽에서만 보일 텐데 때마침 차도 처분했다. 존과 마이클이 창 없이 직접 보고 겪기를 바라는 감독의 설정이겠다.


출발할 때 내리던 비는 도착할 때 햇빛으로 바뀐다. 가장 초라했던 집은 그 햇빛을 받아 가장 반짝이는 집이 된다. 창 너머로 볼 때는 초라하지만 직접 마주했을 때는 가장 가치 있었음을 날씨의 변화로 말하는 것 같았다.


이 마지막 장면에 감독의 모든 결말이 있었다. 창밖에서 보는 건 그 창이 아무리 투명한들 한계가 있다고. 진짜로 닿으려면 창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직접 닿아야 하는 건 죽음도 예외가 아니라고. 삶과 죽음은 그저 막힘없이 서로 닿을 수 있는 일상이라고.


러닝타임 내내 신파도 쿨함도 없이 건조하다. 건조한 만큼 보는 사람은 계속 운다. “경고 : 전 세계의 모든 휴지까진 아니더라도 손에 잡히는 휴지는 다 써야 할 수도 있음”이 아마 가장 정확한 평이겠다. 너무 울어서 나는 말린 귤껍질이 된 거 같았다.




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저자 이지수는 이어령 님을 ‘죽음이라는 거대한 동굴을 들여다보고 그 벽에 삶이라는 빛의 열매를 드리우는 능력을 지닌 분’이라고 말한다.


거장끼리는 이렇게 통하는 걸까. 이어령 님의 능력을 우베르토 파솔리니(Uberto Pasolini) 감독이 시각화한 게 노웨어 스페셜 같다. 존의 죽음은 거대한 동굴이었으나 마이클에게 꼭 맞는 입양 가정을 찾아서 그 동굴 벽에 삶이라는 빛의 열매를 드리운다. 마이클의 새로운 삶이 빛일 테고 존이 남긴 편지가 그 삶을 지속하게 하는 또 다른 빛이 될 거다. 타계하신 이어령 님의 글이 남아 빛의 열매가 되듯 말이다.


두 시간 동안 현실의 삶을 완전히 잊게 하는 영화가 있는 반면, 두 시간 내내 현실의 삶 옆에 존재하는 영화가 있다. 노웨어 스페셜은 단연 후자다.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가장 직접적으로 삶과 죽음을 내놓는다. '골목에서 놀던 아이를 엄마가 불러서 들어가는 게 죽음'이라고 단순하게 설명한 이어령 님과 또 통한다.


이 영화를 추천한 언니는 '삶이 하찮게 느껴질 때' 보라고 했다. 아니었다. 삶이 하찮을 때, 삶이 화창할 때 둘 다 필요한 영화였다. 하찮을 때는 소중함을, 화창할 때는 겸손함을 주기에 그렇다. 한 편의 영화가 삶의 굴곡을 조종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모든 장면에서 죽음이 느껴지는데 어떻게 모든 장면이 아름다울 수 있는지.


마음을 가다듬고 싶을 때 다시 보고 싶어지는 영화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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