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보고 쓰다

똥 마려운 강아지를 자유케 하는 K 씨

안녕_신앙생활

by 음감

축구 골찬스는 가만히 서 있는다고 오지 않는다. 나에게 공이 올 거라고 믿고 죽어라 달리는 자에게 온다.

작가 김정주 님(이하 김싸부)에게 새겨진 말 같기도 했다. 그가 축구팬이라 그런 건 절대로 맞다.

그는 이미 전도사, 이미 작가다. 각 그라운드에 그냥 서 있어도 된다. 고민 없이 설교할 수 있고 신간 없이 작가 할 수 있다.

그걸 뒤로 하고 그는 죽어라 달린다. 축구선수는 공 찬스를 바라고 달렸다면 김싸부는 뭘 바라고 달렸을까.

그의 신간 #안녕_신앙생활 이 답한다. 그는 '나 찬스'를 위해 달린다. 고유한 나로 사는 찬스를 얻기 위해 죽어라 달리고 있었다.

사역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아서 힘들었단다. 교회 권위가 이토록 떨어진 시절이 또 없었으니 당연하다.

악한 세상 탓을 하며 '기도나 해야지'라고 끝날 수도 있다. 한두 명의 자정으로 될 일이 아니니 더 그렇다.

이 거대 담론을 김싸부는 일곱 살 아이의 동화책으로 풀어간다. 그게 김싸부의 나다움이었다. '기도나 해야지'식의 답은 도피 같은데 그렇다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뭣해서 독자를 똥 마려운 강아지로 둔다. 반면 동화책으로 푸는 답은 시원하게 똥을 끝낸 강아지의 자유로움을 독자에게 준다. 그래, 당장 못 바꿔도 이 정도는 내가 하지… 식의 용기라고 할까.

발음도 어려운 신학 주석에서 답을 찾기보다 생활로 답을 찾는 것, 생활로 찾으니 몸에 새기기도 더 쉬울 터, 그의 나다움은 이렇게 단단해진다.

그의 나다움은 질문을 만든다. 감사하라, 기뻐하라의 선포에 왜?라는 반론은 감히 못한다. 그러니 설교자에게 더 편한 길이다. 그 길을 두고 김싸부는 굳이 실망해, 걱정해, 낙심해라고 권장한다. 저 전도사는 위로는 못할망정 왜 저러냐 소리가 나올 말이다.

왜 저러냐를 받아칠 답을 세련된 언어로 정제하는 것 또한 그의 나다움이었다. 김싸부라고 해서 질문이 생기자마자 정리된 문장으로 답이 바로 오진 않을 터, 사유를 다듬는 과정이 있었겠지. 그의 나다움이 그렇게 담금질되고 있었다. 김싸부표 벼려진 문장을 통해 독자는 낙심하라는 말까지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는 답정너가 싫었다고 말한다. 그게 싫었으니 스스로의 답을 이렇게 찾나 보다. 가장 개인적인 답을 찾았는데 그게 다듬어지니 가장 보편적인 답이 된다. 자유한 강아지의 명랑한 발걸음이 그려진다.

김싸부의 '나다움 답 찾기'를 응원한다. 읽기 두 시간으로 그의 답을 이리 쉽게 얻어가서 미안해지지만 그게 또 독자의 영역이겠거니 에둘러본다. 더 단단해질 그의 다음 답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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