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
학교를, 직업을, 사는 곳을 속였어도 여자는 그럴 수 있다고 애써 이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는 남자의 태백 본가에서 아침 10시부터 술에 취해 있는 예비 시어머니와, 당뇨성 치매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예비 시아버지와, 가출 3년 만에 아이만 데리고 돌아왔다는 스무 살 시동생을 만났다.
주 7일 개인 레슨과 반주비로 모은 천만 원을 남자친구 카드빚 청산에 썼어도 여자는 어쩌다 생긴 사고라고 믿었다.
남자친구 가족을 만난 여자는 그 천만 원은 일상에 가까울 수 있음을 깨달았다.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이별을 고했다.
"사흘동안 6시간 잤나? 그마저도 중간에 자꾸 깨서 두개골이 쪼개지는 기분이야."
서울역 근처 허름한 선술집, 남자는 여자가 헤어졌다는 말에 본인 집도 안 들린 채 서울로 먼저 올라왔다.
"니가 헤어지자 해놓고 왜 니가 못 자? 유난을 떨어요 아무튼."
면박을 주면서 남자는 여자 술잔을 자기가 슬쩍 비워버린다.
"여기서 15분만 가면 해밀턴 지하에 찜질방 있는데 갈래? 혼자는 못 가겠더라고. 뜨끈하게 지지면 안 깨고 잘 수 있지 않을까?"
"할머니냐. 지지면서 자게."
30분 후, 그들은 해밀턴 지하 찜질방이다. 뜨끈하게 등을 지지던 여자가 먼저 말한다.
"등만 뜨끈하면 뭐 해. 꼬리한 냄새에, 답답한 공기에, 시끄럽기까지. 차라리 호텔방으로 올라갈까?"
너 지금 20대 대한민국 육군 병장과 단둘이 호텔방을 가자고 하는 거냐?라고 남자는 묻지 못했다. 10분 후 남자는 호텔 룸 결제 영수증을 손에 쥔 채 침대에 흡수되는 여자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렇게 30분이 흘렀을까, 잠든 줄 알았던 여자가 부스스 일어난다. 눈물이 맺혀있다.
"아니 왜 자다 말고 울어."
남자는 잽싸게 침대로 가 눈물을 닦아주고 여자를 눕힌다. 모로 누운 여자 얼굴 밑으로 눈물 한 방울이 똑 떨어진다. 저도 모르게 여자를 안고 토닥거리던 남자는 아래로 피가 쏠리는 걸 느끼고 몸을 살짝 떨어뜨린다.
토닥거림에 진정되었을까. 이번엔 여자가 진짜 잠이 든 듯 고개가 툭 떨어진다. 여자의 한쪽 볼이 남자의 명치에 폭 파묻힌다. 떼면 깰 까봐 상체는 고정한 채 다리만 사선으로 뻗어 남자는 여자와 더 떨어진다. 몇 년 전, 수련원에서 봤던 그 자세다.
'야, 너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