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가 할 일이 없을 때
노회한 악마 스쿠르테이프가 조카 웜우드에게 인간을 현혹하는 방법에 대해 훈시를 늘어놨다. 인간에게 생각할 시간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게 이들의 가장 큰 목표다.
CS루이스의 ‘스쿠르테이프의 편지’는 기독교 변증법의 걸작이지만 핸드폰에, 대기업의 마케팅에, 정부 정책에 갖다 붙여도 얼추 들어맞는다. 핸드폰과 대기업과 정부가 악마라고 하기는 좀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아예 악마성이 없다고도 못하겠다.
일상의 무게에 눌린 사람들은 20년을 내다봐야 하는 장기적 비전까지 생각하기 힘들다. 65세 무임승차부터 시작해서 노동, 연금, 교육 같이 긴 호흡을 내다봐야 하는 일에 정치권이 입을 다무는 이유도 여기에 있겠다. 당장 총선이 급하니 단타성 발언이 계속 나온다. 당장 김포 이슈만 봐도 서울시 측에서는 아직 검토조차 안 했다고 하지 않는가.
11월이 되면서 블프 광고창이 계속 뜬다. 지금 안 사면 내가 뭔가 큰 기회를 놓친다는 식으로 나를 몰아간다. 나도 어느새 세뇌당했는지 맨날 꺼버리던 창을 하나 열었다. 어, 우리 집에 이거 없는데, 저거 있으면 좋을 수도 있겠네… 하다가 화들짝 놀라 창을 닫았다. 내 필요가 내 욕구가 아닌 남이 만든 광고창에서 출발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그 자체가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을 뺏는 스쿠르테이프 의도에 딱 맞다.
요새는 은행업무, 병원예약, 학교 선생님 소통 등 꼭 필요한 일을 핸드폰이 해준다. 그런 일들 사이에 신출귀몰하게 숨은 광고창은 결국에 나를 무릎 꿇게 만든다. ‘40세 주부가 월 천을 만든 숨은 비법, 드디어 공개됐다’ 식의 후킹 문구가 눈을 사로잡는다. 광고라는 거 알면서 들어갔다가 쇼핑 창에서 길을 잃는, 이 역시 생각 없이 랜선을 좀비모드로 떠도 인간을 만들어낸다.
고대 수메르 벽화에서도 ‘요즘 시대는 말세다’라고 한다지만 그때는 적어도 이만큼 초연결 사회는 아니었다. 지나친 연결과 지나친 알 권리가 생각하는 힘을 지워버리는 게 아닌가 싶다. 스쿠르테이프가 말합니다. ‘조카야, 내가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그냥 내 의도대로 세상이 흐르는 거 같구나. 우린 그냥 구경이나 하자.”